[레이히로] 네가 없는 세계에서 (1/2)
나의 생애는
지름길을 돌아서
네게로 난 단 하나의 에움길이었다
-나희덕, <푸른밤> 중
그 날은, 조직이 인체실험을 위한 데이터의 희생양으로 선정한 7살 아이를 공안에 보내기로 한 날이었다.
자정이 지난 늦은 밤, 히로미츠는 황량한 폐허로 천천히 발을 옮겼다. 본래 보육원이었을 이 곳. 낮이라면 아이들이 마당에서 뛰어놀거나 그네를 타고 소란스러워야 할 곳이다. 담벼락에 아이들이 소박하게 그린 그림들도, 다소 촌스러운 색이지만 따뜻한 느낌을 주던 건물 벽도, 아이들이 계단을 오르다 다칠 것을 염려해 2층으로 지었다던 건물 앞에 다정하게 그들을 내려다보던 마리아상도.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화단에 얼기설기 장식했던 전구들은 파편으로 남아 자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히로미츠의 발아래 밟혔다.
조직의 유능함은 때로 이런 데서 힘을 발휘했다. 전날까지 멀쩡하던 보육원이 폭발 사건으로 한명도 남김없이 죽었는데도, 뉴스에조차 실리지 않는다. 히로미츠는 가끔 자신이 그들과 같은 나라에서 사는지 헷갈렸다. 이 평화로운 나라에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로 수십명의 사람이 죽었는데 누구도 모른다.
화재가 진압된 건물 내부에는 간혹 들리는 물소리와 히로미츠가 내는 발소리만 들렸다.
"어째서...?"
피스코는 그에게 이미 모든 일은 버본이 수행했다고만 말했다. 침묵하는 그에게 공을 뺏겨 시무룩한 것이라 생각했는지 3인자가 되면 따로 부르겠다는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히로미츠는 기도실의 십자가를 올려다보았다. 면류관을 쓴 예수는 그 폭발에 절반이 날아간 채 히로미츠를 내려다보았다. 답을 구하는 어린양을 보는 그 모습에, 무릎이 떨려 유리조각이 가득한 바닥에 엎드렸다.
히로미츠는 버본의 결단력과 실행력이 두려웠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다. 빛 아래에 있던 그의 연인과는 다른 사람이다. 그렇게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으면, 언젠가 레이를 스스로 떠날 것만 같았다. 약속했는데, 떠나지 않겠다고, 곁에 있겠다고. 네게 그렇게 약속했는데.
아이를 데리러 올 생각으로 입은 정장에 얇은 코트는 영하의 온도에 얼어붙었다. 주먹을 쥐는 손으로 깨진 유리가 파고들어 피가 흘러내렸다. 십자가 아래 엎드려 억지로 차가운 공기를 폐 안에 들이마시던 히로미츠가 고개를 들었다.
하얀 장갑을 낀 고운 손에 쥔 흰 천이 얼굴을 덮었다.
레이, 왜 그랬어?
눈을 뜨자 보이는 것은 아이보리 색의 천장. 몇 번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훑었다. 인기척이 없는 방 안에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위의 회색 이불은 가볍고 포근해 적은 손짓에도 쉽게 밀려났다. 모노톤의 평범한 침실 안으로 햇빛이 쏟아져 가득했다. 조직에 잠입한 후 한가로이 낮에 일어난 것은 오랜만이었다.
두터운 트레이닝 복을 상의만 입고 있는 건 좀 어색했지만, 발목에 걸린 차가운 금속보단 나았다. 왼발을 들어 괜히 사슬을 창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비추니 반사된 빛이 천장에 물고기처럼 도망 다녔다.
히로미츠는 그 천장 속 빛나는 물고기를 눈동자로 쫓다가, 곧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길이가 넉넉한 것보다 허술하게 침대에 연결한 게 더 무서웠다. 끊고 나가봤자 의미가 없단 경고다. 히로미츠 홀로에게 하는 어리광이면 상황이 나쁘지 않다.
여기서 괜히 건드리는 것보다는, 정말 이 상황이 차라리 나은 것이 아이러니했다.
히로미츠는 베란다 아래로 보이는 한가로운 풍경을 턱을 괴고 구경했다. 최소한 15층 이상이다. 탈출할 생각이 없는 걸 알아도 봐줄 생각도 없는 거겠지.
집안은 생각보다 평범했다. 긴장하며 이곳저곳 조심스레 살폈지만 무색하게도 평범한 1LDK였다. 당연하지만 TV나 전화는 없다. 냉동실 가득한 도시락 중 하나를 전자레인지에 데워먹었다. 역시나, 레이다. 자신이 요리를 가르쳤으니 모를 수가 없다.
몇 숟가락 깨작거리다, 입맛이 떨어져 쓰레기통에 쳐박았다. 임무 중에 납치한 것도 모자라 모습도 드러내지 않는 레이에게 화가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게다가 그 아이는, 7살이었는데. 히로미츠는 마른세수를 했다.
음식을 먹으면 졸린다. 히로미츠는 두 번째 도시락부터 그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며칠째 오지 않는 레이를 물만 마시며 기다리다가, 타협하기로 했다. 몸이 상해서 막상 만났을 때 제압할 수 없으면 의미 없는 기다림이 된다.
발견하진 못했지만 도청기가 있을 거라 생각해 혼자 미친 사람처럼 소리도 질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이 고급 맨션에 저만 사는 것도 아닐 텐데 방음이 좋은 건지 항의하러 오는 사람도 없었다.
양을 조절해가며 레이를 기다리기를 결정한 후 닷새가 지난 밤이었다. 저격수를 한 짬이 있어 기다리는 건 큰일이 아니다. 현관 앞에 앉아 문이 열리기를 기다린 게 며칠째인지. 단서가 있을까 싶어 책장을 뒤졌지만 평범한 책들이었다. 한 번도 이런 취향일 거라 생각하지 못했는데 고전 설화로 빼곡한 책들에 기가 질렸다.
인어, 불사조, 이무기 등에 관련된 이야기가 적힌 책들을 성의 없이 넘기다 덮었다. 그 날은 책장에 꽂힌 책을 다 빼냈다가 다시 넣는 걸로 하루를 보냈다.
* * *
드디어 열리는 문소리에 벌떡 일어나 다가가려던 히로미츠가, 뒷걸음질 쳤다.
이 사람은... 레이가 아니다.
"보고 싶어서 기다린 줄 알았는데."
"...너... 누구야."
"바로 눈치채버리네."
"누구냐고!"
다정하게 미소 짓는 싸늘한 눈의 남자는, 히로미츠의 목을 잡아 벽에 밀어붙였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혹은 예상치 못한 인물의 등장에 히로미츠는 미처 그 손을 피하지 못했다. 숨이 모자라 넘어갈 듯 꺾이는 고개에도 손속에는 망설임이 없다. 히로미츠는 점멸해가는 시야 속 고통에 몸부림쳤다. 부족해지는 공기에 남자의 손을 긁어내며 저항하던 손에 힘이 빠져나갈 무렵 남자가 놓아주었다.
그 짧은 사이에 진심으로 죽여버릴 것처럼 몰아붙인 게 착각일지 모른다. 폐 깊은 곳으로부터 올라오는 기침이 아니었으면, 터져 나오는 눈물이 아니었으면 히로미츠도 그렇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말 안 듣는 아이를 달래는 부모처럼 남자는 엎드린 히로미츠의 머리를 다정히 쓰다듬었다.
"난 항상, 궁금했어. 네 심장이 어떻게 생겼을지. 어떻게 뛰고 있을지."
여전히 기침을 멈추지 못해 엎드려있던 히로미츠의 머리채를 오른손으로 버본이 잡아 올렸다. 꺾이는 목에 억지로 시선이 들려 마주한 얼굴이 눈물에 흐릿하게 보였다. 깜빡이는 눈가로 눈물이 흘러내렸지만 흔들리는 시야에 보이는 애처로운 얼굴이 그가 알던 사람인지는, 알 수 없었다.
버본은 왼손에 낀 장갑을 입으로 물어 벗었다. 성가신 듯 벗어낸 장갑을 그대로 바닥에 버려둔 채 히로미츠의 오른쪽 귀 뒤로 머리카락을 넘겨주었다. 잦아드는 기침 속에 미지근한 손가락이 오른쪽 턱 아래를 매만지다 심장으로 내려갔다.
조그만 콧노래를 부르며 껴안는 버본에 그를 껴안지도 내치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턱 밑으로 와닿은 금사같은 머리카락. 품에 안긴 레이였어야 할 사람의, 따뜻한 체온. 특유의 달콤하면서도 묵직한 시트러스 향. 잃어버린 부모에게 안긴 아이처럼 버본은 히로미츠의 심장에 귀를 대고 안심한 듯 키득거렸다.
다소 과격한 인사 이후, 소파에 앉은 히로미츠의 옆자리에 눕듯이 기댄 버본은 턱을 괴고 그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불편해진 히로미츠가 그를 외면했지만, 버본은 크게 신경 쓰는 눈치는 아니었다. 그저 원하던 장난감을 손에 넣어 기뻐하는 아이처럼 질리지도 않아 하며 히로미츠를 쳐다본다.
히로미츠는,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보자마자 알았다. 이 사람은 레이가 아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애초, 버본은 레이가 연기하는 조직원의 가면일 뿐이다. 레이는 평소 버본과 자신을 철저히 분리해 연기했다. 그래서 히로미츠는 스카치로 있는 동안 한번도 버본과 있을 때 그를 레이로 대하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문제는, 히로미츠가 스카치로 있는 동안 버본과 접점이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이다. 솔직히 히로미츠는 왜 버본이 자신을 감금한 건지 그 이유도 짐작 가지 않았다. 마치 시한폭탄 옆에 있는 기분이다. 그것도 절대 멈출 수 없는.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좋았을걸."
"??"
"히로도 나랑 있으니까, 좋지?"
갑자기 들리는 말에 눈을 마주치니 쳐진 눈을 곱게 접으며 웃어 보인다. 그 눈에 띄는 달콤한 외모에 자주 허니트랩을 썼을 거라 오해받는 버본의 미소 그대로다. 단 한 번 본 적 있다. 하지만 파티장이 아닌 고문실이었다. 억지로 자리에서 버티던 스카치는 버본의 축객령이 떨어지지마자 도망쳤었다.
그 피 냄새. 소독약 냄새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던 인간의 체액이 뿜어내는 습기 찬 냄새. 끊임없이 주입되던 정체를 알 수 없는 내용물의 주사들. 고통에 몸부림치던 희생양의 비명.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무감하게 내려다보던 버본이 짓던, 다디단 미소.
"왜일까. 네가 왜 그랬는지 난 항상 궁금했지. 왜 네가 날 버렸을까. 왜 나는 네게 믿음을 주지 못 했을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 말 그대로다. 히로미츠는 단 한 번도, 레이를 버린 일이 없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히로미츠에게 버본은 소파 위로 나머지 무릎을 끌어와 웅크리며 히로미츠를 바라보았다. 발목에 걸린 의미 없는 사슬에 스스로 묶인 사냥감에 만족한 포식자의 미소를 짓는다.
"참았지. 항상 참았어. 네가 라이한테 기대는 걸 보면서도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
그때까지 무감했던 눈동자에 깃드는 애틋함을 놓치지 않은 히로미츠가 중얼거렸다.
"...레이?"
"응. 맞아, 히로. 내가 레이야.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야."
아, 드디어!
히로미츠는 다급하게 남자의 어깨를 붙들었다. 하고 싶은 말이,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그래서 히로미츠는, 순간 냉랭해진 남자의 눈동자를 보지 못한 척 해버렸다.
"레이, 어떻게 된 거야. 네가 왜 피스코의 지령을 수행한 거야? 난 왜 여기 있어? 잠입업무는? 그 애는? 그 아인 고작 7살이었어!"
"아직 상황파악이 안 되는구나."
남자는 안타까워하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의 의미를 파악할 새도 없이 목에 날카로운 것이 파고들었다.
그 밀실. 그 비명. 그 속에서 웃던 그 남자.
히로미츠는 뒤로 넘어가는 시야 속에서 레이를 찾으려했다. 하지만 이미 어두워지는 시야 속에 연인의 얼굴을 했던 남자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히로미츠는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아이보리 색의 천장. 다시 눈을 굴려보지만 바뀐 것은 특별히 없어 보였다. 그는 조금 적적하게 느껴지는 불 꺼진 방에서 일어났다. 방안의 히터에도 겨울밤의 공기가 차갑게 몸 위에 내려앉았다. 히로미츠는 귓가의 이명에 잠시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약을 놓은 걸까, 히로미츠는 주사를 놓은 목 부근을 어루만졌다. 얼마나 잔 건지 목이 칼칼해 문을 열고 부엌으로 향했다. 물을 마신 후 돌아보니 소파에는 아까와 달리 편한 옷차림의 버본이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입력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히로미츠를 돌아보며 미소 짓는 것이, 퍽 여유로웠다.
"잘 잤어?"
"......"
"어떻게, 처음부터 네게 설명해줘야 할까? 날 너무 실망시키지 않길 바라는데, 히로."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난 버본은 그대로 히로미츠에게 직진했다. 다가오는 남자에 멈칫했지만 거부가 능사는 아니다. 그가 흘리는 하나의 정보라도 받아들이는 게 모든 것을 빠르게 끝낼 열쇠가 될 것이다. 순순히 건네진 손가락 위로 입을 맞추는 버본을 바라보며 히로미츠가 물었다.
"내가 널 버렸어?"
"응."
"언제?"
버본은 히로미츠를 침실로 끌고 침대에 가 앉았다. 뒤에서 끌어안긴 채 끊임없이 목이며 귀를 지분거리는 입술을 외면하며 대답을 기다렸다.
히로미츠는 레이의 신념과 의지, 그리고 그를 이뤄내는 능력을 믿었다. 그것만큼은 누구도 무너트릴 수 없는 믿음이었다. 세상 모두가 변절해도 레이의 강직한 신념만은 태양처럼 그를 지탱할 것을 믿었다. 그런 사람이다. 어두운 곳에서도 스스로 빛을 발하는 그런 사람.
파고드는 손에 긴장하는 몸을 알아챈 건지 버본은 귓가에 낮은 웃음을 터뜨리고는 히로미츠의 어깨에 이마를 비볐다.
"다 가르쳐주면 도망칠 거잖아."
"레이..."
"오랜만에 들으니까 좋다, 내 이름."
몸을 돌려 마주한 얼굴은 예전 그 사람이다. 히로미츠는 그의 뺨에 손을 대었다. 남자는 그런 히로미츠에 어쩐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 얼굴에, 히로미츠는 이 또한 연기일지 생각하는 자신을 알아챘을 레이에게 미안해 눈길을 떨어뜨렸다.
"히로. 제발 깊게 생각하지 마. 넌 아무 것도 안 해도 돼. 여기 있어.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내가 무엇이든 해줄게."
뺨에 닿은 손이 떨어질 새라 붙든 남자의 애원에 히로미츠는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 시선을 놓치기 싫어하는 게 가여워 히로미츠는 품에 파고드는 남자의 등을 토닥였다.
기묘한 동거의 시작 후 히로미츠는 주기적으로 버본이 놓는 주사를 맞았다. 잠에 드는 것 외에 특별한 부작용은 없어 보였다. 눈을 뜨고 거실에 나가면 항상 그가 있었다. 그저 버본은, 히로미츠가 자신이 없는 사이에 깨어있는 것이 싫은 듯했다.
처음 감금할 때는 그를 고려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일이 있었는지 추측할 뿐이다. 그 사이 히로미츠는 버본을 상대로 여러 시도를 했다. 그가 히로미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을 즐거워해서, 주로 어린 시절 추억이나 학창 시절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다.
내년 하기와라의 기일에는 같이 성묘를 가자는 약속도 했다. 약속을 하며 새끼손가락을 내미는 히로미츠를 보며, 레이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웃음을 터뜨렸다.
"크리스마스에는 뭐하지?"
"크리스마스?"
"응. 이제 곧이니까."
마주 앉아 저녁을 먹다 갑자기 나온 화제에 히로미츠는 숟가락을 입에 물고 눈을 굴렸다. 레이는 그런 행사를 챙기는 사람이 아니다. 그렇다면 버본일까? 이제 히로미츠에게 버본은 레이가 만들어낸 가면이 아니다. 분리하여 생각하기엔 둘의 경계가 너무 옅었다.
"그렇구나. 경찰학교 졸업한 이후로는 한 번도 챙긴 적이 없었네."
"응. 한 번도."
"...아! 그때 진짜 웃겼는데. 기억나? 하기와라가 산타 복장으로 마츠다 방에 들어가선,"
말을 잇던 히로미츠가 멈칫했다. 눈앞의 남자는 그런 히로미츠를 턱을 괴고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식탁 위에 켜진 어둑한 조명등 외에 집에는 불이 없어 히로미츠는 남자와 음식 외에는 잘 보이지 않았다. 좋아하는 걸 해주고 싶었다며 차린 식탁에는 파스타며 샐러드들이 히로미츠의 선택을 기다렸다.
손에 쥐어진 와인 잔에 담긴 화이트 와인은 오늘 남자가 만들어 준 파스타와 어울려 모든 것이 완벽한 저녁처럼 보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남자의 미소 짓는 입가와 달리 공허한 눈동자가 너무도 시려 히로미츠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구었다. 갑자기 이 모든 것이 연극처럼 느껴졌다. 그제까지 달았던 와인이 쓰게 혀끝에 머무른다.
잔을 내려놓고 히로미츠가 중얼거렸다.
"기억나? 우리... 중학교 때."
"......"
"그때 수녀님이... 아이들이 노래 듣고 싶어 한다고 우리한테 부탁했었잖아. 그래서... 우리가 안 된다고 했었잖아. 막... 아이들이 왜 그렇게 안 된다고만 하냐고 그래서 우리가... 너는 그때 학교 교가 부르고... 나는 음악 교과서에 나오는 노래 불렀었는데."
잔에 비치는 얼굴은 일그러져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었다. 주황빛의 어둑한 조명이 비추는 식탁 위 음식들은 먹음직스러웠지만,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음식들처럼 보였다. 히로미츠는 마주 앉은 남자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고 조그맣게 말을 이었다.
완벽한 저녁 식사를 망치기 위한 작은 반항처럼 히로미츠는 정해지지 않은 대사를 읊었다.
"갑자기 그 노래, 기억이 안 나. 레이. 넌 기억하지? 너는... 뭐든 다 기억하잖아."
"......"
"레이, 기억하지?"
다급하게 고개를 드는 히로미츠는 목에 파고드는 따끔함에 눈을 부릅떴다. 넘어가는 시야 속으로 비친 남자의 얼굴은, 이 연극을 망친 배우에 대한 실망도 분노도 아닌, 이 모든 것을 다시 한번 해야만 하는 자의 괴로움에 가까웠다.
레이는, 기억을 잃고 있다.
히로미츠가 그 사실을 눈치챈 이후로, 버본은 더 이상 그가 알던 레이를 연기하기 위해 애쓰지 않았다. 그는 단지 히로미츠가 들려주는 과거의 이야기를 기꺼워하며 들었다. 본인의 이야기인데도 마치 타인의 이야기를 듣는 듯 즐거워하는 모습에 히로미츠는 답답해졌다.
아무리 히로미츠가 고장 난 녹음파일처럼 반복해서 레이와의 추억을 이야기해도 버본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 했다. 영특한 머리와 비상한 기억력은 분명 그대로일 텐데, 왜인지 레이의 과거만 자꾸 그에게서 잊혀져갔다.
처음 이야기할 때는 그래도 희미하게나마 반응했다. 분명 그들의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즐거워하며 반짝이던 눈동자는 틀림없이 그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공기를 기억하는 사람이었다.
그때 들었던 것과 같은 이야기인데, 이제 그는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의 과거를 듣는 것처럼 무감한 표정을 짓는다. 그 눈동자에 히로미츠는 때로 자신마저 그에게 스쳐 가는 작품 속의 배역처럼 느껴질까 두려워 종종 레이를 붙들었다. 그런 히로미츠에게 레이는, 안심시키려는 듯 습관처럼 웃었다.
그 날도 습관처럼 품에 파고들어 심장 소리를 듣는 레이를 토닥였다. 크리스마스라 어딘가로 가지 않겠냐는 제안은 잊힌 지 오래였다. 레이는 그저 히로미츠가 이 자리에서 그를 기다리면 족해 보였다. 미래를 그리는 약속도 더는 레이를 기쁘게 하지 못 했다.
그저 여기,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날이 바스라져가는 톱니바퀴라도 본 것처럼 강박적으로 히로미츠를 붙들었다. 그런 레이를 보는 것이 괴로워서, 말없이 그를 안아주는 것밖에 해줄 수 없었다.
* * *
히로미츠는 무감하게 차창 밖을 바라보았다. 신년이니 신사를 들리자며 오랜만에 밝게 웃는 레이에게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정장 차림이 다소 어색한 감이 있긴 했지만 운전까지 해주는 사람 옆에서 와카야마현까지 가는 걸 불평하는 것도 애매했다.
신년이라 사람이 붐비긴 했지만 재주좋게 차를 댄 레이와 산책하며 계단을 올랐다. 한번 뜬 물로 5번에 걸쳐 몸을 정화하는 의식을 마치고 신사에 들러 기도한 후 죽백나무를 보러 갔다. 천년이 넘게 그 자리에 있었다는 나무 앞에 히로미츠는 조직의 인체실험을 떠올렸다.
불로불사를 원한 것일까? 아니면, 정말로 죽은 자를 되살리는 것을 원했을까? 불어오는 겨울바람을 맞으며 생각에 잠긴 히로미츠를 끄는 레이에 마을로 내려가니 축제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그러고 보니 궁금하네. 이 신사는 무슨 신을 모시고 계셔?"
"불새."
"불새? ...불사조 말하는 거야?"
의아해하는 히로미츠에게 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일본의 신은 실존하는 것들이 많다. 불사조라니, 조금 독특했다. 그래서 사람이 이렇게 많은 걸까. 어느 시대나 어느 나라건 많은 사람들은 죽음 대신 영생을, 노화 대신 젊음을 원한다.
히로미츠는 구석진 자리에 있는 사격게임에 상품으로 걸린 반지를 보고 걸음을 멈추었다. 철로 만든 링 위에 어색하게 얹힌 청회색의 돌이 눈길을 끌었다.
"반지 갖고 싶어?"
"...그러지 마. 네가 하면 무조건 이기잖아."
"보는 눈이 있구먼? 이 반지는 말이야, 죽음을 넘는 반지야. 이건 돈을 줘도 못 구하는 거라고."
과장된 몸짓으로 설명하는 주인을 보며 그렇게 귀한 반지라면 다른 가게와 달리 이렇게 휑한 이유는 무엇일지 생각했다. 히로미츠는 그저 생긋 웃어 보였다. 레이는 그런 히로미츠를 흘긋 보고는 주인에게 바로 돈을 쥐여주었다. 얼마 후, 레이의 사격 솜씨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둘은 반지만 받고 도망치듯 인파를 헤쳐나왔다.
"내가... 분명히 그러지 말라고-"
"임시 프로포즈 링."
"뭐?"
어느새 해가 져 어둑해진 거리는 하나둘씩 꺼져가는 가게 조명에 적적해져 갔다. 그 속에서 가로등 불빛에 반지를 비춰본 레이는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히로미츠의 왼손을 잡아 끌었다.
"죽음을 건너는 반지라잖아."
"죽음..."
왼손 약지에 끼워지는 반지를 내려다보며 히로미츠가 중얼거렸다.
죽음, 불사조, 기억을 잃어가는 레이, 희미해져 가는 레이와 버본의 경계, 심장 소리.
모든 연극은 엔딩을 맞는다. 그것이 어떤 결말이든.
"레이, 그 날 죽은 사람은... 나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