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베르] 낙원
오래 알고 지내다 보면, 그리 서로 가깝게 지내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자면, 종종 어울리지 않게도 대배우의 숨겨진 연인으로서 참여할 수 밖에 없는 파티에 여자의 옆자리에 서 있으면 보이는 것들은 생각보다 많다. 첫 번째로, 여자는 생각보다 남들에게 관대한 편이라는 것. 두 번째로, 그런데도 자신의 이름이 불리는 것은 꽤 싫어하는 편인 것.
포마드로 넘긴 은발을 로우 포니테일로 묶은 진의 곁에는 항상 비슷한 흐름이 있다. 상류층의 파티장에 크리스 빈야드의 파트너로 등장한 진의 외모에 술렁이다가, 홀로남은 그에게 다가와 여자의 정보를 캐내려다 아무 반응 없는 진이 싸늘하게 내려다보면 살인자의 기색에 창백하게 질려 떠나곤 했다.
잘도 이런 역겨운 짓을 해대는군, 라며 속으로 비꼬긴 하지만 대외적으로 크리스 빈야드라는 인물이 필요할 때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정보라는 것은 흘러내리는 모래나 흩날리는 바람과 같은 면이 있어, 인간들 사이에 섞여들지 못하면 놓칠 때가 있다. 그리고 그들의 보스는 그 실수를 용납하지 못 한다. 게다가 여자의 외모는, 눈이 마주치는 순간 그 공기 속에 둘만 존재하는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청록의 눈동자 속, 마치 누구도 알지 못하는 숲에서 단 둘이 존재하는 듯 덧없는 환상. 그 환상에 속아 가진 모든 것을 발아래 바치려는 벌레 같은 것들이 몇 마리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진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행복한 척 미소 지으며 황홀한 표정을 꾸며내는 여자를 멀리서 지켜보았다. 어두운 청록색의 머메이드라인의 드레스는 빛을 받으면 여자의 눈동자색과 흡사해 보였지만 어둑한 조명 아래 그림자에 발을 들이면 핏물조차 삼켜버릴 검정으로 바뀐다. 어떤 색을 원해서 저 드레스를 고른 건지, 가끔 진은 여자가 자신이 아는 인물이라 확신할 수 없었다.
확신? 생각해보면 우스운 단어다. 크리스 빈야드나, 샤론 빈야드, 베르무트. 그 어느 이름에도 여자의 진실은 없다. 입버릇처럼 비밀은 여자를 여자답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비밀을 담은 이름으로 불리는 건 어떤 기분인지. 크리스로 불릴 때마다 싸늘하게 가라앉는 공기가 만족스럽다. 모든 상황을 웃음으로 무마하며 넘기려는 여자가 경멸하는 것이 있다는 게 참을 수 없이 남자를 기쁘게 만든다.
그러나 동시에 불쾌했다. 그 경멸을 자신이 만들 수 없다는 게 가끔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결국 절대자의 결정에 복종해야 하는 건 그 누구도 아닌 진이다. 크리스나 샤론으로 불리는 걸 경멸하는 베르무트를 알면서도 진은 보스의 결정에 반기를 들고 싶지 않으므로 절대 그 이름으로 베르무트를 부르지 못할 것이다. 그것만은 넘을 수 없는 신의 영역과 같았다. 단지 자신의 목적만을 위해 신이 여자에게 하사한 가명조차 이용할 수 없는 것이 진의 한계였다.
이 자리조차 거부하려면 할 수 있는 위치임에도, 보스가 원하기 때문에 진은 꿋꿋이 저 멀리 버러지 같은 인간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 베르무트를 지켜본다. 너만큼 그 아이를 잘 아는 사람도 드물잖니, 다정한 신의 명령에 진은 착한 아이처럼 대꾸도 없이 따른다. 수많았던 배신에도 늘 평온하던 신이 원하는 단 한 가지가 그 너머의 세계에 현혹되지 않길 원한다면, 진은 신이 원하는 대로 행할 것이다.
“이만 돌아갈까.”
“벌써? 아직 조금 이른데….”
서운한 듯 말하는 행태지만 내버려 둔 왼팔의 위를 남은 오른손으로 잡아 손가락을 두드려 장소를 이동해야 함을 표현한 건 베르무트다. 이 곳에서 더는 수집할 정보가 없다는 뜻이겠지. 서버에게 부탁해 입구에 맡겼던 드레스의 숄을 여자에게 걸치며 어깨를 감싸자 어리광부리듯 그의 품에 얼굴을 기댄다.
품의 반에 겨우 차는 여자의 어깨에 얹은 손을 허리로 내리자 더욱 취한 척하며 기대온다. 대외적으로 쓰는 흔한 향수 사이로 연하게 섞인 아니스¹의 향은 이때가 아니면 맡을 수 없는 특권과도 같은 순간이다. 하지만 그 찰나에 매혹되면 어떤 지옥이 펼쳐지는지 이미 남자는 시간의 베일을 헤쳐온 후다. 그런데도 때로, 이 향이 주는 그 시절의 무모함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기억 속에 각인된 모든 순간을 차라리 지우는 게 나은 일이겠지만 휘둘리는 자신을 비웃는 것도 이제는 그리 감상을 동반할 정도로 새로운 일이 아니다. 진은 짧게 사라지는 아니스 향을 무시하고 여자를 부축하는 척하며 연회의 중심에서 멀어졌다.
“크리스(Chris)² 양!”
“…….”
품 안의 여자에 깃든 살기는 퍽 새로웠다. 어차피 가명을 싫어하는 약점따위, 진이 알아봤자 이용할 수 없는 걸 알기에 드러내는 감정이다. 뒤를 돌아보는 진의 시선에 말을 건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여전히 안겨 있는 채라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샤론(Sharon)³씨에게 꼭 전해주지 않겠습니까?”
“…….”
“그 이름에 걸맞은, 꼭 어울리는 역입니다. 그녀만을 생각해 쓴 각본입니다. 부탁드립니다. 한 번이라도 고려해달라고 제발, 제 말을…”
“…너무 시끄러운데.”
그제야 취해서 주절거리던 남자가 진의 목소리에 시선을 정확히 인지하자마자 기겁하며 물러난다. 진심으로, 더 들어주기엔 너무나 시끄러웠다. 왜 기분이 안 좋았는지 알만했다. 조만간 죽일 껍데기에 대한 이야기에다 '그 이름'에 걸맞은, 이란 표현만 들어도 어떤 헛소리를 들었는지 알만했다.
아마 의미 없이 베푼 행동을 또 착각해서 하루살이처럼 꼬인 거겠지. 빈 껍데기만 남은 걸 모르니 그 환상에 현혹된 버러지가 질리지도 않고 꼬이는 것이다.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어머니께 해주시겠어요?”
“하지만!”
“죄송하지만, 제 애인의 참을성이 그리 좋지 않아서. 다음에 기회가 닿으면 봬요, 작가님.”
진의 품속에 숨었던 여자는 고개만 젖혀 얼음장 같은 시선을 보낸다. 어머니와 사이가 좋지 않아야 한 자리에 자리할 일이 없는 필요도 있지만, 진은 그녀가 진심으로 샤론이란 존재를 경멸하는 것을 안다.
낙원. 약속의 땅이자 성스러운 땅. 모든 존재가 태어나고 죽어가는 어머니의 품이 될 존재.
어쩌면 그 청록의 눈이 모든 죄의 근원인지도 모른다. 구원을 바라는 자에게 죽음의 잔을 건네는 악마와 같은 색에 예술가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바라며 베르무트에게 가진 모든 것을 바치려 들 것이다. 진은 얼어버린 작가를 보며 자신의 팔에 고개를 젖혀 기댄 채 웃음을 터뜨리는 여자의 몸을 추슬러 시야를 가렸다.
“진.”
“…….”
“무엇도 꿈꾸지 마. 무엇도 바라지 마. 무엇도… 절대로.”
“헛소리.”
일축하는 답에 베르무트는 그제야 기분이 풀린 듯 보인다. 그 시간들 속에 한가지 배운 것만은 잊지 않았다. 그녀에게 절대로, 그는 죽을 때까지 어떤 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이 이 모든 거짓을 진실로 덮을 수 있는 베일이 될 것이다. 그래야만 서로가 인정하는 존재로 남을 것이다.
원하는 순간 길거리에 채는 돌멩이가 될 것을 안다. 그리고 진은 베르무트가 자신을 그렇게 취급할 것을 용서하지 못할 자신을 알고 있다. 연회장 바깥에 싸늘한 가을밤 공기에 움츠러들며 파고드는 여린 실루엣을 움켜쥐었다. 리무진의 뒷좌석에 타 여자를 무릎에 앉히자 가는 팔이 목 뒤를 끌어안는다. 흩어지는 한숨 같은 목소리가 입술 위에 내려앉았다.
“응. 헛소리네.”
그 말을 하는 목소리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출발하는 엔진 소리에 진은 확신할 수 없었다. 어차피 여자와 함께하는 모든 밤이 진에게는 그랬다. 어깨를 가볍게 물면 간지러운 듯 웃음을 터뜨리는 여자의 품에 파고들며 상념을 지웠다.
¹아니스anise : 압생트absinthe의 재료 중 하나
²Chris : christian, 본문에서는 Christ를 대신한 이름으로 가정
³Sharon : I am a rose of Sharon, a lily of the valleys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에 핀 백합화로다 (구약 아가서 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