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아카히로] 뉴욕의 이방인 Edit.ver

Unknown with RSB 2022. 1. 30. 18:44

저녁 식사 후 TV를 함께 보던 둘 사이에 대화가 끊겼다. 예능프로의 방청객들의 과장된 웃음소리와 선풍기 소리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히로미츠는 조용한 후루야를 돌아보았다. 둘은 대학에 진학하며 2LDK의 도쿄 외곽 낡은 아파트에서 같이 살고 있었다.


다소 남동생 같은 이 소꿉친구는 히로미츠의 곁에서 늘 재잘대는 편이었다. 비상한 두뇌의 그가 조용한 일은 드물기에, 히로미츠는 방금 전 자신의 말이 그렇게까지 파급력이 센지 곱씹었다.



"언제라고?"
"일주일 후에..."
"그걸 지금 말한다고?"
"어... 제로는 어차피 출국 못 하니까...?"



그 말에 후루야는 마른세수를 하고 천장을 한 번 봤다. 히로미츠는 그의 앞에 놓인 컵을 재빨리 들고 부엌으로 뛰었다.



"나는 이 여행 반댈세!!!!"
"왜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히로. 거기는 총기가 허용되는 나라야. 이 나라와는 다르다고. 거길 혼자서 가겠다고? 심지어, 홋카이도도 있고 오키나와도 있는데. 아니, 하와이도 아니고 뉴욕을 혼자서 가겠다고?"



어느새 거실을 빙글빙글 배회하며 과장된 손짓으로 연설하는 후루야를 보며 히로미츠는 기가 질렸다. 그가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는 건 알고 있다. 물론 히로미츠도 그렇지만, 그렇대도 뉴욕에 가는 것만큼은 어릴 때 영화를 본 후 정해놓은 일이다. 이것만큼은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후루야가 집안 사정으로 해외출국을 못하기에 권할 수도 없었다. 히로미츠도 혼자서 가는 여행이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거기다 도쿄에서 직항으로 출발해도 13시간에 가까운 비행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히로미츠는 가고 싶었다.


후루야도 그런 히로미츠의 표정을 보았다. 웬만하면 후루야의 억지에 져주는 히로미츠도 가끔 고집을 부릴 때가 있다. 후루야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안 돼! 안 된다고! 그런 위험한 나라는 절대! 절대 안 돼!"
"난 어린 애가 아니야! 20살이라고!"
"20살이 어린애지 뭐가 아니야! 최소한 그런 총이 난무하는 위험한 나라는 아니야! 국내로 만족해!"
"싫어! 이미 비행기표는 취소도 못 하고 이 여행은 내가 중학생 때부터 세운 거야! 갈 거야! 갈 거라고!!"



화가 난 히로미츠가 방문을 쾅 닫고 들어가 버렸다. 후루야는 옆집 사람의 항의에 사과를 하며 울분을 삼켰다. 시무룩한 표정이라도 지어볼까 생각했지만 이번은 안 통할 것 같다.



그렇게 둘이 다투긴 했지만, 결국 후루야가 꺾였다. 대신 후루야는 히로미츠가 여행을 준비하는 일주일 동안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다. 그는 히로미츠를 도우면서도 짐 싸는 걸 방해했다. 자꾸만 공항에서 통과할 수 없는 것들-라이터나 사제무기 같은-을 캐리어에 넣으려 들어 히로미츠가 방에서 쫓아내고야 얌전해졌다.


히로미츠는 후루야가 뒤에서 들러붙으며 자신을 방해하건 말건, 여름의 뉴욕을 그리며 들떴다. 여행가는 일주일 동안 먹을 음식들을 냉동실에 차곡차곡 넣어주는 히로미츠에게 평소 좋아했던 것들을 후루야는 리스트까지 만들어 주었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은 자제하더니, 짐 싸는 걸 방해하는 목적인지 욕심을 채우려는 건지 후루야 자신도 헷갈렸다.


출국날 아침에는 히로미츠 혼자 출발했다. 후루야는 후루야대로 할 일이 많기 때문이다. 잠을 자며 칭얼거리는 후루야의 이마에 입을 맞춘 후 새벽의 거리를 나섰다.


일주일이라지만 결국 비행시간을 제외하면 5일 정도의 여행이었다. 살면서 나고야, 도쿄, 수학여행으로 갔던 교토를 제외하면 여행 자체를 가본 적이 없었다. 첫 해외에, 그것도 뉴욕이라니 스스로도 미친 것 같았지만 그럼에도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심장이 설렘으로 미친 듯이 뛰었다.


이렇게까지 신이 난 건 문화제에 베이스로 후루야와 오른 이후 처음인 것 같다. 후루야는 생각도 안 났다.
아니, 나긴 하지만 돌아올 때 선물 사 올 테니 봐줘, 제로!





지루한 비행기 안에서 시차 적응을 하려면 아예 안 자거나 계속 자야한다고 해서, 히로미츠는 자는 쪽을 택했다. 설레긴 했지만 이번 여행을 위해 다소 무리하며 파트타임을 한지라, 생각보다 잘 잘 수 있었다. JFK공항에 도착한 히로미츠는 수속을 끝내고 공항버스에 올라탔다.


난생처음 보는 건물과 풍경에 히로미츠는 눈을 깜빡이는 것도 까먹을 뻔했다. 공기마저 조금, 다르게 느껴졌다. 버스에서 내린 후 여름 아침의 공기를 들이마시며 예약한 브루클린의 숙소로 출발했다.


일본인이 운영하는 작은 게스트 하우스의 친절한 남자 주인은 아침에 도착한 그를 기다렸다. 혹여 길을 잃을까 걱정한 주인은 히로미츠를 보고 퍽 안심한 것 같았다. 다소 가파른 계단을 올라 집 안으로 들어서니, 거실로 나가는 탁 트인 베란다로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잘 보였다. 히로미츠는 오히려 그 이유로 이곳을 택했다.



"야경이 더 예쁘다네, 어린 친구. 이 근처 리큐어(liqour) 스토어에서 20불 이하의 와인을 추천받아 마시면서 보는 것도 좋을 게야."
"네, 꼭 그렇게 할게요. 아침부터 감사합니다."



활짝 웃는 히로미츠에게 마주 웃은 주인은 키를 넘겨주고 떠났다. 4인실 룸의 옷장에 캐리어를 넣은 후 지하철을 타고 센트럴 파크로 가는 5번가를 걸었다. 평일 낮인데도 관광객들과 현지인들이 섞여 거리는 자칫 정신을 놓으면 인파에 휩쓸려 갈 듯했다. 히로미츠는 최대한 주의하며 걸었지만 한 남자와 부딪히고 말았다.


서로 눈이 마주쳐 히로미츠는 무의식적으로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조금 들뜬 상태긴 했다. 홀로 오롯이 이방인이 되어 걷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런 설렘이 얼굴에 스몄는지, 아니면 단지 취향이었는지 부딪힌 남자는 자신과 히로미츠를 검지로 가리키며 웃어 보였다.


히로미츠는 당황했다. 말 한마디 없었지만 성애적 어필임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다급하게 손을 들어 흔들며 고개를 저으니 남자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인파로 사라졌다.


도쿄라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히로미츠는 새삼 이곳이 자유의 나라임을 깨달았다. 잠깐 두근거리는 심장의 울림을 진정시켰다.



히로미츠가 5일을 뉴욕에서만 보내기로 한 이유는 그만큼 이 도시를 즐기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보고 싶었던 센트럴파크에서 여러 사진을 찍고, 존 레논의 모자이크 기념비도 구경했다. 그는 돗자리를 펴고 하늘을 보며 음악을 듣기도 하고, 책을 읽으며 현지인 흉내를 내기도 했다.


돌아가는 길에 후루야 생각에 린트에서 초콜릿을 샀다. 화려한 조명과 가게 가득한 초콜릿 냄새에 조금 외로워졌다. 여기 왔으면 좋아했을 텐데.


히로미츠는 첫째와 둘째날 동안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자유의 여신상을 페리를 타고 구경하러 가거나, 근처의 월스트리트를 걸으며 직장인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메트로폴리탄 박물관도 가보았다. 어찌나 넓던지, 도저히 다 구경할 수도 없었다. 타임스퀘어의 붉은 계단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셋째날 저녁엔 미술관을 들렀다. 이 도시는 미술관이 너무 많아 일주일 동안 하루 하나의 미술관만 넣어도 관광코스가 꽉 차버렸다. 실물로 보고 싶었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엄청난 인파로 가득해 겨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관심도 없던 피카소의 그림에 압도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구경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여행 왔어요?"
"?? 네..."



일본에선 저보다 큰 사람이 없는데, 남자는 히로미츠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커 보였다. 당황하며 크로스백의 끈을 잡는 히로미츠를 보며 남자가 웃었다.



"미술관에서부터 봤는데. 혹시 시간 있어요?"
"어... 왜 그러시죠?"
"제가 일본어에 관심이 있어서 그러는데, 친구가 되고 싶어서요."



그 말에 히로미츠는 경계를 풀었다. 좋지 않은 의도였다면 굳이 저를 고를 필요가 없을 것이다. 히로미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근처에 야경이 예쁜 바(bar)가 있어요. 일단 그쪽으로 옮겨서 얘기 할까요?"
"Bar요?"
"네. 제가 잘 아는 곳이에요. 관광객들은 잘 모를 거예요."



히로미츠는 조금 의아했다. 카페도 아니고 굳이 bar를 선택한 의도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여차하면 제압할 자신이 있어서, 그대로 따랐다. 남자가 간 곳은 호텔 내에 있는 고층 루프탑바였다. 추천한 대로 뉴욕의 야경이 전면유리로 아름답게 비쳤지만 히로미츠는 조금 주눅이 들었다.


그는 다급히 시선을 내려 옷차림을 점검했다. 다행히 반팔 셔츠에 슬랙스라 그런지, 입구에서 컷 당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근데 저... 돈 별로 없는데요..."
"걱정 말아요. 제가 살게요."



루프탑바에, 술을 사겠다는 남자.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지만 히로미츠는 생각을 다잡았다. 키가 180에, 남자다. 친구가 되자는 사람이다. 과한 생각이다.



"여기, 스크류 드라이버¹* 한 잔이랑 럼콕 한 잔."



주문 후 웃어 보이는 남자에게 히로미츠도 입꼬리를 올렸다. 사실 술은 잘 모른다. 스무살이 된 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다. 곧 나온 칵테일을 보니 오렌지 주스처럼 보였다. 역시, 생각이 과했다. 히로미츠는 안심하고 한모금 들이켰다. 조금 쓴 맛이 나긴 했지만 긴장이 풀렸다.



"여기 이 시간에, 아코디언을 잘 치는 동양인 연주자가 있어요. 기대해도 좋아요."



그 말에 히로미츠는 다시 칵테일을 빨대로 마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곧 연주자가 무대 위로 올랐다. 흰 셔츠에 검은 바지를 입고 포마드로 머리를 넘긴 남자는 다소 날카로운 눈매에 연둣빛 눈동자로, 부자연스러울 법도 한데 오히려 깊이가 있어 보였다. 옷 때문인지 마른 느낌이었지만 전체적으로 체격이 다부져 연약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는 객석을 한번 훑었다. 기분 탓인지 눈이 마주친 듯했다.



"오늘도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이 뉴욕의 밤을 즐기시는데 제 연주를 허락하시길."




히로미츠는 이 공간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창밖으로 보이는 뉴욕의 야경과, 반짝거리는 조명들 사이로 앉은 이국의 사람들, 그리고 그 사이로 남자의 아코디언 연주까지 전부 다. 저도 모르게 턱을 괴고 남자의 연주를 듣고 있었다.



"오늘 마지막 날이네요. 그동안 제 연주를 사랑해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객석은 아쉬워하는 분위기로 술렁거렸다. 그런 관객을 보며 미소지은 남자가 다시 아코디언을 연주했다. 히로미츠는 아무 생각 없이 마시던 칵테일을 다 마신 후 얼굴에 열이 올라 손바닥으로 부채질을 했다. 조금 어지러워 테이블 위에 손을 기도하듯 모으고 이마를 대는데 허리를 타고 내려가는 손에 얼굴을 들었다.



"뭐... 뭐 하는 거예요?"



남자는 히로미츠의 말에도 씩 웃으며 허벅지로 손을 옮기려했다. 다급히 잡아채는 히로미츠에 남자가 미간을 구겼다. 밀치려는 히로미츠의 손목을 남자가 붙들었다.



"뭐야? 너도 좋아서 따라온 거 아니었어?"
"친구 하자고 했잖아요. 이게 친구가 하는 짓이야?"
"하, 어이가 없네. 이거 순진한 척 하는 거야, 뭐야? 너 그쪽인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얼마면 되는데? 비싸게 구네, 진짜."



그대로 잡은 손목을 끌고 나가려는 남자를 히로미츠가 테이블 위에 제압했다.



"난 그딴 생각한 적 없어. 한 번만 더 이따위로 굴면 가만 안 둘 줄 알아."



으르렁거리며 말한 히로미츠는 바로 계산서를 들고 입구 쪽으로 갔다. 본래라면 기다려야겠지만 그러기 싫었다. 이미 눈에 띄는 상황인지라 카운터도 그런 히로미츠의 태도를 이해하는 듯했다. 가진 돈을 다 털어 계산하고 나와 화장실에 들러 얼굴을 씻었다.
젖은 얼굴을 들어 보니 뺨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얼마나 독한 칵테일이었던 건지. 히로미츠는 아무 생각 없이 남자를 따라온 자신이 한심했다.


후루야가 안 된다고 길길이 날뛴 이유가 납득이 갔다. 거기다 돈도 다 써버렸다. 예산에 맞춰 들고나온 돈이라 나머지는 숙소에 있는데 어떻게 돌아가야 할지 모르겠다.


짧게 한숨을 쉬고 페이퍼타올로 얼굴을 닦아냈다. 거울 속으로 아까 전 연주자가 입구에 기대어 있는 게 보였다. 더는 상대하고 싶지 않아 나서는데 남자가 말을 걸었다.



"아까 멋있던데. 인상 깊었어."



히로미츠는 무시하고 나가려 했다. 갑자기 넘어질 뻔하지 않았으면 그랬을 것이다. 다급히 잡아준 남자가 아니었다면 위험할 뻔했다.



"감사합니다..."



얼굴이 홧홧해졌다. 속삭이듯 말한 히로미츠가 넘어질 뻔한 몸을 일으키려 무릎에 힘을 줬다. 하지만 이번엔 무릎이 풀렸다. 살면서 이렇게까지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히로미츠는 주먹을 쥐고 어떻게든 해보려했지만 소용없었다. 술을 처음 마셔보는 몸에는 너무 독한 칵테일이 문제였다.



"진짜... 진짜 죄송한데요. 건물 밖... 까지만 데려다주실래요..."



히로미츠는 남자의 부축을 받아 호텔 밖 벤치에 앉았다. 밤바람을 맞으며 자괴감에 얼굴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갑자기 손에 닿는 차가움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생수병을 든 남자가 서 있었다.



"감사합니다. 제가, 아까 전 일 때문에, 그, 플러팅인 줄 알았어요. 죄송해요."
"미안해하지 마. 플러팅 맞으니까."



어이가 없어진 히로미츠가 마시던 물병을 내려놓았다. 그런 히로미츠를 내려다 보던 남자가 팔짱을 끼고 짓궂게 웃었다.



"이제야 똑바로 봐주는군."



어두운 조명 아래서도 존재감을 드러내던 얼굴이다. 가로등 아래의 남자는 놀랍게도 히로미츠의 이상형을 실현한 듯했다. 어릴 때부터 후루야의 얼굴에 익숙해져 웬만하면 놀라지 않는 히로미츠도 이 얼굴에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후루야가 귀여운 계열의 미남이라면 이 남자는 고전 영화에서 나온 듯한 미남이었다.


후루야를 보면서도 덤덤한 히로미츠를 보며 다들 눈이 어디까지 높아질 거냐며 놀려댔다. 히로미츠 스스로도, 결혼은 고사하고 좋아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의문이었다.


이렇게 살다 후루야가 결혼하면 혼자 살 생각이었는데 여기서 이상형을 만나는 일이 가능할 리가... 있다. 히로미츠는 홀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 집에 가는 걸로."
"네??"
"내가 했던 말, 혹시 못 들었나? 갈 데 없으면 내 집에 가겠냐고 물었는데. 여기서 걸어갈 수 있거든."



아까부터 자꾸 반말을 쓰는 남자에게 반발할 새도 없이 몸이 일으켜졌다. 어느새 앞서 걷는 남자를 따르며 히로미츠가 변명처럼 말을 늘어놓았다.



"제가 어디 막 그냥 따라가는 사람 아니고요. 아까전에, 술 값으로 돈을 다 써서. 그 사람이 내준댔는데, 그런 의미인 줄 몰랐어요. 그래서, 돌아갈 돈이 없는데, 혹시 빌려주시면..."
"요리 잘 하나?"
"네?"
"내일 아침 말이야. 영국식으로 해주면 좋겠는데. 난 어떻게 해도 불을 질러버려서."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남자는 히로미츠를 보며 재밌어하기만 했다.



"난 아카이 슈이치. 슈라고 불러도 돼."
"예에?? 아뇨, 그냥 아카이씨라고 할게요. 전 모로후시 히로미츠에요."
"아-아. 그렇군. 그럼 히로라고 부를게."
"네?? 아니, 저희 방금 만났고..."



항의하는 히로미츠에게 발걸음을 멈춘 아카이가 얼굴을 들이밀었다. 다가오는 얼굴에 놀란 히로미츠의 상체가 점점 뒤로 넘어갔다. 갑작스레 얼굴에 닿는 손에 놀라 펄쩍 뛰는 히로미츠의 어깨를 아카이가 잡아 눌렀다.



"속눈썹. 나는 딱히 별명으로 불러도 상관없어. 여기는 내 이름을 제대로 부르는 애들이 없거든. 너도 곧 이해하게 될 거야."



곧 도착한 건물은 보수공사를 준비하는 중이었는지 비계(scaffolding)가 외벽에 설치되어 있었다. 5층까지 올라가니 옥상에서 시끌벅적한 소리가 계단을 타고 내려왔다.



"미안하군. 옥상이 아지트가 되어서 말이지. 좀 시끄러울 거야. 혹시 가볼 생각 있나?"
"좋아요."



오래된 철문을 밀자 시끌벅적한 공기가 히로미츠를 덮쳤다. 아까 전 루프탑과 달리 격식 없이 다들 편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같은 뉴욕인데도 이곳은 훨씬 생동감이 넘쳤다.


사람들 사이에 끼어서 이야기하던 히로미츠는 금방 아카이의 말을 이해했다. 4글자나 되는 일본어를 다들 어려워해 히로라고 부르랬더니 손뼉을 치며 히어로라고 좋아했다. 그렇게 히로미츠의 주위에 다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여행을 온 계기에 중학생인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혹시 아는 팝송이 있냐는 물음에 고등학교 축제 때 비틀즈 팬이라 그들의 노래를 베이스로 쳤다는 말에 다들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혹시 기타로도 칠 수 있냐기에 가능하다고 하자 어느새 넘겨받은 기타에 당황하던 히로미츠가 연주를 시작했다.


우물쭈물하며 첫 곡으로 'I wanna hold your hands'를 쳤다. 두 번째로 'Yesterday'를 치자 사람들은 떼창을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Hey Jude'를 치니 다들 어깨동무를 하며 노래를 불렀다. 어느샌가 히로미츠도 웃으며 가사를 흥얼거렸다.


웃고 떠든 파티 후 히로미츠는 아카이의 침대에서 함께 잠들었다. 아카이는 소파로 충분하다는 히로미츠의 허리를 붙들고 잠에 빠졌다. 반항하려던 히로미츠도 며칠간의 여행으로 지쳐 금방 잠들었다.



"?? 아카이씨. 저보고 만들어 달랬잖아요."
"어제 연주에 대한 보답? 먹을 수 있을진... 모르겠지만."



눈치를 보며 말끝을 흐리는 아카이를 보며 히로미츠가 웃음을 터뜨렸다. 토스트기에 넣기만 하면 될 식빵 색이 왜 까만 갈색인지, 거기다 발라먹을 만한 잼은 한 티스푼 정도만 남아있었다. 어쨌든 성의를 생각해 한 입 베었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둘은 가까운 베이글 전문점으로 가 간단히 아침을 해결했다. 계산은 아카이가 했다.



"어젠 고마웠어요. 정말 재밌었거든요.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어요."
"좀 시끄럽긴 해도 나쁜 애들은 아니야. 좋았다니 다행이군."
"돈은, 지금 제가 가서 가져올게요."
"그건... 어제 연주로도 충분해. 그보다 나는, 너와 오늘 함께 지내고 싶은데."



어제 막무가내로 굴던 남자는 어디 갔는지, 아카이는 약간 쭈뼛거리며 말을 이었다. 히로미츠가 거절할까 눈치 보는 것이 보였다. 오히려 지금의 그가 인간적으로 느껴졌다.



"좋아. 슈."



그 말에 슈이치는 조금 눈을 크게 뜨더니, 히로미츠에게 미소 지었다. 여행 4일째의 아침이었다.
슈이치는 히로미츠를 따라 게스트하우스에 갔다. 그는 히로미츠가 옷을 갈아입을 때까지 건물 아래에서 기다렸다. 그들은 브루클린 브릿지에 들렀다가, 개선문 근처의 야외 햄버거 가게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슈이치가 단골인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바깥사람들을 구경하기도 했다.


어제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 모네의 수련을 같이 보기도 했다. 독실에 걸린 수련은 금방이라도 그들의 앞으로 쏟아질 것만 같았다. 벽의 세 면을 넓은 캔버스로 가득 채운 그 풍경은 아마 모네가 보던 것과 같을 터라, 마치 그 시간대와 시대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한참을 그 앞에 서서 바라보는 슈이치의 뒷모습이 왠지 서글퍼 보였다. 히로미츠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았다. 슈이치가 히로미츠에게 손을 내밀었다. 히로미츠가 그의 손을 마주 잡자, 슈이치는 그 손을 끌어당겼다. 히로미츠는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그들은 그렇게 그 풍경 앞에 말없이 서 있었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 그들은 간단히 장을 봤다. 저녁으로는 간단히 샌드위치를 해 옥상에서 야경을 보며 의자에 앉아 맥주와 먹었다. 내일 아침은 첫 만남에서 슈이치가 바라던 영국식 아침을 해주기로 했다. 맥주를 다 마셔갈 때쯤 슈이치가 입을 열었다.



"어느 쪽이 일본인인지 궁금한가?"
"...네가 말하고 싶으면."



그 말에 슈이치는 남은 한모금을 입에 털고 씁쓸하게 웃었다.



"아버지가, 일본인이야."



별로 놀라지도 않는 히로미츠를 보며 슈이치는 빙긋이 웃었다. 그런 그가 어쩐지 쓸쓸해 보여, 히로미츠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는 히로미츠의 손을 잡고는, 뉴욕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이제 내일이면, 나는 이 도시를 떠날 거야. 아버지를 찾아서. 당분간은, 돌아올 수 없겠지."
"우연이네. 나도 내일이면, 일본으로 돌아가야 되는데."



그런 히로미츠의 말에 슈이치는 하늘을 보던 시선을 그에게로 옮겼다. 히로미츠는 조금 힘을 주어 잡아 오는 손을 엄지로 쓰다듬어주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있을지 몰라. 목숨을 걸어야 되겠지. 그런데 너한테는 다 말하고 싶어져. 하지만 널 위험하게 하고 싶지는 않아. 이제 그만, 돌아가도록 해."



히로미츠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돌아가길 바란다면서 슈이치는 히로미츠의 손을 놓지 못했다. 히로미츠가 손에서 힘을 빼자 슈이치는 시선을 내리며 손을 물렸다.


히로미츠는 자리에서 일어나 슈이치에게 다가갔다. 고개 숙인 슈이치의 얼굴을 잡아 시선을 마주했다. 히로미츠는 그의 입가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어차피 난 일본으로 가야 하는데?"
"처음이라면, 무리하지 마."
"내가 하고 싶어서, 라면?"



상기된 뺨으로 웃으면서 고개를 기울이는 히로미츠에 슈이치는 침묵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이 사람을 제 것으로 만들고 싶은 마음과 아껴주고 싶은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둘은 내려와 간단히 샤워 후 편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잠들려는 슈이치의 위에 히로미츠가 올라탔다.



"뭐 하는 거지?"
"궁금해서?"
"호기심이 새를 죽인다, 는 말 알아?"
"난 새가 아니야, 슈."


"히로 너... 정말 고집이 세군."
"원래, 지고 못 살아서."


잠깐 어두워졌던 시야가 돌아오니 슈이치가 옆으로 누워 뒤에서 자신을 끌어안고 있었다.
완전히 돌아누워 마주 보았다. 어둑한 수면등 아래로 보이는 눈 밑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이상했다.

그와 처음 루프탑바에서 눈이 마주쳤을 때부터 이렇게 될 것만 같았다. 그래야할 운명처럼 느껴졌다. 그가 자신의 연약한 면을 보여줬을 때, 히로미츠는 이 하룻밤만이라도 자신의 위로가 닿기를 바랐다.
히로미츠는 슈이치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슈이치는 어쩐지 조금 울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히로미츠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눈을 뜨니 슈이치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허리가 좀 아리고 아래쪽에 이물감이 있었지만 생각보다 버틸만했다. 간단히 씻은 후 슈이치의 티셔츠를 옷장에서 꺼내 입었다. 하품을 하며 스크램블 에그를 만든 후, 베이컨을 굽고 베이크드 빈즈를 간단하게 졸였다.


토스트기에 넣었던 식빵을 곁들인 후 간단히 밀크티를 끓이는데 냄새에 일어난 슈이치가 히로미츠의 뒤에 매달렸다.



"부지런하네... 안 피곤해?"
"네가 매달리는 게 더 피곤한데? 빨리 가서 씻고 와."
"알겠다..."



슈이치는 졸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히로미츠의 목덜미에 이곳저곳 입을 맞추었다. 결국 화장실까지 히로미츠가 매달고 가 떨군 후에야 세수를 했다.



"어젠 어떻게 일찍 일어난 거야?"
"네가 없을 거 같아서... 잠을 잘 못 잤다."



아침 식사를 하며 묻는 말에 슈이치는 눈을 비비며 대답했다. 그런 슈이치의 어리광에 히로미츠는 짧게 웃음을 터뜨리곤 고개를 저었다. 마주 앉은 작은 식탁 아래로 와닿는 발에 서로 발장난을 쳤다.


식사를 마치고 설거지를 하는 슈이치의 등에 이번엔 히로미츠가 매달렸다. 복수라는데도 마냥 웃으며 얼굴 이곳저곳에 입을 맞춰 김이 빠진 히로미츠가 손을 풀었다. 재빨리 설거지를 마친 슈이치가 젖은 손으로 히로미츠의 허리를 끌어안고 간지럼을 태웠다.


옥상에 올라가 늦은 아침의 풍경을 보며 서로 어릴 때 이야기를 했다. 슈이치는 그가 영국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아버지에게서 여러가지를 배웠던 것, 그래서 처음 미국에서 영국식으로 말했을 때 주목받았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히로미츠는 슈이치에게 형이 하나 있는 것, 아주 친한 소꿉친구가 있는 것, 자신의 고향은 나고야이고 아주 아름다운 동네라는 것들을 말해주었다.



헤어질 시간이었다. 둘은 현관에 서 있었다. 신발을 다 신은 히로미츠가 슈이치와 마주 보았다. 슈이치는 히로미츠를 붙잡을 수도 보낼 수도 없었다. 이 문을 그가 나서면 이제 두 번 다시 못 볼 수도 있었다. 그런 슈이치를 보던 히로미츠가 그에게 입을 맞추었다.
곧 이어지는 키스에서 짠 맛이 나서, 히로미츠는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시 너를 만날 수 있을까."



슈이치의 중얼거림에, 히로미츠는 살짝 발끝을 들어 그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슈이치는 그런 히로미츠를 끌어안았다. 서로 놓아주기 싫어서, 그렇게 한참을 안고 있었다.



"안녕."



결국 히로미츠가 슈이치를 밀어냈다. 히로미츠는 마지막으로 그의 입가에 키스한 후 문을 나섰다. 다시 문을 열고 들어가고 싶어서, 슈이치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싶어서, 히로미츠는 숨이 차도록 울며 건물 바깥으로 나서고도 한참을 뛰었다.


이미 늦은 오후였다. 아무리 밤 비행기지만 이제는 숙소에서 짐을 챙겨야했다. 그런데도 너무 날씨가 좋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히로미츠는 몇걸음 걷다 눈물을 닦고, 다시 걷다가 울음을 터뜨렸다. 겨우 울음을 그치고 게스트 하우스에 맡겼던 짐을 챙겨 숙소를 나섰다.



히로미츠는 마지막으로 모네의 수련을 홀로 보았다. 혼자인데도, 곁에 슈이치가 있는 듯했다. 같이 보고 있던 그 순간인 것만 같았다.


언젠가 그가 다시 이 도시에 돌아와 이 그림을 보면, 그도 내가 곁에 있는 것처럼 느낄까.


마지막으로 기프트샵에서 작은 액자로 된 수련을 산 히로미츠는 공항으로 떠났다.





후루야는 일주일 만에 보는 소꿉친구를 보며 반가워하다가 멈칫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 히로미츠가 아주 잠깐 뜨끔했지만 이내 활기차게 웃으며 캐리어를 풀었다.



"제로, 이것 봐-! 제로가 좋아하는 초콜릿 사 왔어!"
"...난 네가 만든 걸 좋아하는 건데?"
"어... 그랬... 그랬구나?"
"이건 뭐야?"



싸늘한 후루야의 말에 당황한 히로미츠가 초콜릿을 내려놓았다. 손에 들린 작은 액자에 당황한 히로미츠가 다급히 뺏으려하자 후루야는 잠깐 액자를 노려보다가 돌려주었다. 서로 봐온 세월이 있는지라 이유도 없이 그런 물건을 살 히로미츠가 아닌 것을 후루야는 안다.
어쩐지 A4 한 장도 안 되는 그림인데 친구를 뺏긴 것만 같은 불안함에 후루야는 그 그림을 찢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그런 후루야를 눈치챈 건지 아닌지 히로미츠는 어설프게 웃었다. 아무리 비상한 두뇌의 소유자라지만 수련을 보고 뉴욕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란 정보가 부족해도 너무 부족하다. 히로미츠는 과한 생각이라며 스스로를 타일렀다.





3년 후.


히로미츠는 공안의 요원으로 한 조직에 잠입 중이었다. 아직 코드네임은 받지 못했다. 여러임무를 수행하지만 그래도 오늘은 운이 좋다. 오늘의 임무는 미술품을 모조품으로 바꾸는 임무였다. 그게 하필 모네의 수련인 것이 퍽 우습긴 했다.


직접 나서는 것은 아니고 현장을 경비하는 업무였다. 경비원인 척 잠입해 다른 조직원들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 도와야 했다. 그는 파트너로 지정된 사람의 무전을 기다렸다. 모로보시 다이라는, 좀 특이한 이름의 소유자였다.



["여기는 포인트 xx.xx, 문제없음."]
"수신완료. 포인트 xx.xx, 문제 없음."



다시 무전기를 양복의 주머니에 넣으려는데 갑자기 들리는 소리에 히로미츠가 멈칫했다. 의아해하며 무전기를 보는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혹시, 비틀즈 좋아하나?"]





<뉴욕의 이방인 END>

¹* 스크류 드라이버의 도수는 25도 이상. 별칭은 레이디 킬러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