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레이히로] 별의 이름

Unknown with RSB 2022. 9. 17. 22:02

주의 : 실성증인 히로를 괴롭히는 애들이 나옵니다..









도쿄의 여름은 빈말로도 상냥하지 않다. 소년은 한쪽 어깨에는 채와 다른 한 손에는 채집통을 들고서, 묵묵히 뙤약볕을 받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동네에서 제일 큰 장수풍뎅이든, 매미든 무엇이든 잡아서 양키라고 놀리는 덩치만 큰 6학년에게 본때를 보여줄 생각이다. 덩치만 크고 친구들이 없으면 레이에게 말도 못 거는 겁쟁이가, 검은 눈과 검은 머리카락만은 레이가 이길 수 없는 특별한 것처럼 여기는 의기양양한 그 턱에 주먹이라도 꽂고 싶었다.

더이상 다쳐서 오면 병원에 한발자국도 들여놓지 않겠다는 좋아하는 선생님의 단언에, 그때 처음으로 레이는 ‘무섭다’는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혼자서 석양이 지는 골목길에서 집으로 돌아갈 때나, 이동수업을 하는데 알려주는 친구가 없어 아무도 없는 교실에 홀로 남아 의자에 꼿꼿이 앉아있을 때나, 무엇이 그리 맘에 안 드는지 상급생들이 불러내 자신의 얼굴에 주먹을 날릴 때도, 알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동시에 처음으로 그녀의 ‘웃는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엘레나가 그녀에게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어주는 그런 미소 말고, 안쓰러운 눈빛 말고, 그녀의 남편이나 어린 딸에게 지어주는 미소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어린 레이로서는 무엇을 가져다주어야 그녀가 좋아할지 알 수 없었다. 애당초 10살 소년의 선물이라봐야 동네 문구점의 싸구려 뽑기에서 나오는 되도 않는 군것질거리거나, 아무 쓸모도 없는 딱지거나, 근처 바닷가에서 주울 수 있는 닳아빠진 유리병 조각들이 전부다.

그런 레이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건지 레이와 같은 머리칼을 가진 엘레나는 골똘이 생각에 잠긴 척 하더니, “꽃으로 만든 화관을 누가 선물해주면 좋을텐데!”라고 말했다. 병원 사람들 모두 그것이 어린 소년에게 베푸는 호의인 걸 알아 다들 키득거리면서도 맞장구를 쳤다. 그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어! 라고 외친 소년이 병원을 뛰쳐나가자 너나 할 것 없이 웃음을 터뜨렸었다.

꽃도 꺽고 장수풍뎅이도 잡아야하고, 바쁜 하루가 될 예정이다.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숲의 입구쯤 아이들이 모여있는 게 보였다. 신경쓰기 싫었다. 하지만 아이들 사이에 쪼그려 앉은 소년의 눈이 레이와 마주치자 저절로 발걸음이 멈추고 말았다.

밤색 머리칼의 남자아이는 학교 뒤 길고양이 같은 눈매 끝에 눈물이 그렁했다. 그 눈동자 안에 비친 빛의 조각들이 별처럼 빛나서, 그 별들에 사로잡힌 어린 왕자처럼 마주볼 수밖에 없었다. 소년은 눈이 마주친 레이에 화들짝 놀라더니 바로 고개를 숙였다.

아, 너도 똑같구나.
내가 남들과 다른 머리색을 가져서, 싫은 거구나.
나 같은 놈이랑 마주보는 것조차 싫은 거구나.

늘 그랬다. 경멸하든지, 무서워하든지. 자신을 대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그 두 가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오직 엘레나만이 예외였다. 알고 있었다. 그랬는데, 엘레나와의 시간 속에서 착각했는지도 모른다. 기대따위 해선 안 되는데. 레이는 손 안의 채와 채집통을 꾸욱 눌러 쥐고선, 고개를 다시 돌렸다.

레이의 등장에 고요해졌던 무리는 그가 자신들을 뒤로하자 다시 시끌벅적해졌다.


“이 새끼 고아라고?”
“어, 확실해.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모로후시 아저씨네는 불임이랬어. 근데 갑자기 얘가 그 집 애라는데, 말이 되냐? 야, 말 좀 해 봐. 너네 부모님 어딨는데?”
“어떻게 10분 넘게 말을 안 해? 이 새끼 벙어리 아냐?”


둔탁한 소리에 저도 모르게 몸이 돌아갔다. 아이들에게 밀쳐진 소년은 머리를 팔로 막을 뿐 어떤 말도 하지 못 했다. 신기한 듯 볼을 꼬집고 머리를 잡아당기며 어깨를 잡고 흔들어대는 아이들에게 비명조차 지르지 못 하는 창백한 얼굴은 눈을 꼭 감은 채였다.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구하기 위해 몸이 뛰쳐나간 건. 살면서 늘 배척만 당하던 어린 레이는 손에 들었던 채를 휘두르며 아이들을 위협했다. 꺼지라고 소리를 목청껏 지르는 레이에게 겁을 먹은 아이들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주춤거리다 한명이 뛰어서 도망치자 약속이나 한듯이 사라졌다. 씩씩거리는 레이의 등 뒤에서 조그만 흰 종이가 불쑥 나왔다.



[고마워]



히라가나로 정갈하게 적힌 글씨가, 어떤 목소리인지 듣지도 못한 그 애의 목소리 같았다. 뒤돌아보자 조금 헝클어진 머리카락과 꼬집혀 발개진 볼로, 소년은 흰 종이를 레이가 잘 볼 수 있게 턱 밑에 들고서 웃었다. 생에 처음으로 받는 감사의 미소에, 별처럼 반짝이는 눈동자를 아까 전 어떻게 마주했는지도 잊고 레이는 시선을 내렸다.



“고마우면… 나랑 같이, 장수 풍뎅이… 잡아주든가. 말든가.”



성큼성큼 앞서 걸어가다 뒤를 돌아보자 놀란 소년은 자신을 기다리는 레이에게 다급하게 뛰어와 걸음을 맞춘다. 그것이, 히로미츠와의 첫 만남이었다. 후에 그의 이름에 빛이 들어가는 걸 안 레이는, 그만큼 그 이름에 잘 어울리는 사람도 없을 거라 생각했다.






* * *






미야노 의원에 같이 가자는 레이의 말에 히로미츠는 다니는 병원이 있기 때문에 안 된다고 했다. 분명 돌팔이일 거다. 한달 내내 그와 함께 있었지만 히로미츠는 입만 벙긋일 뿐, 새된 목소리조차 내지 못했다. 나 때문에 레이도 같이 괴롭힘 당하면 어떡해, 동그란 글씨는 걱정처럼 종이에 눌려있었다. 레이는 그런 멍청이들과 노느니 너와 노는게 훠얼씬 재밌다고 말했지만, 히로미츠는 난처한 듯 웃어보일 뿐이었다.

엘레나에게 말을 못하는 병은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지 물으러 왔던 레이는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오늘 출장이 있어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에, 레이는 애꿎은 발끝을 바닥에 툭툭 치며 불만으로 입을 삐죽였다.



“어머, 말을 못 한다구?”
“세상에, 어린 애가 불쌍하기도 하지…. 꼭 인어공주 같네.”
“무슨 인어공주야. 너도 참 실없다, 진짜.”



목소리를 잃은 대신 다리를 얻은 공주님. 레이는 머리에 내리꽂히는 깨달음에 안녕히 계세요! 라 외친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를 내달렸다. 병원에서 뛰지 말렴! 하고 외치는 간호사들의 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그래, 공주님이다. 동화책은 재미없어서 자주 읽진 않았지만, 그 내용만큼은 똑똑히 기억한다. 동화 속 공주님들을 구한 방법은 언제나 똑같았다.

약속처럼 놀이터 구석에 앉아 책을 읽는 히로미츠가 보였다. 시끄럽게 떠드는 애들을 배경으로 레이가 추천한 책을 고요히 읽는 히로미츠의 속눈썹 아래로 옅은 그늘이 졌다. 헐떡거리는 숨소리를 진정시키고 놀라게 하기 싫어 벤치 끝을 모스 부호로 두드리자 히로미츠는 고개를 들어 다정히 눈매를 접어 레이를 향해 웃어보였다.



“히로, 말을 하게 되면 어떨 거 같아?”



한번도 생각해본 적 질문처럼 동그랗게 눈을 뜬다. 히로미츠는 이내 곤란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모르겠어. 왜? 내가 말을 못해서 싫어?]
“아니! 그게 아냐!”



절박한 외침에 히로미츠는 그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면, 말 하는게… 더 즐겁지 않을까, 히로….”



알 수 없는 마음에 소리부터 질렀던 레이는 그 감정이 맺혀 얼굴 위로 뚝뚝 떨어졌다. 틀렸다. 왕자님처럼 멋있게 말하고 싶었는데. 히로미츠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그렇겠지. 남들하고 다르게 생긴 내가 왕자님이 될 수 있을리가 없잖아. 누군가를 구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그런 레이를 들여다보던 히로미츠가 흰 손을 뻗어 레이의 뺨을 감싸고는 엄지로 눈물을 닦아냈다. 여름임에도 늘 서늘한 히로미츠의 체온이 닿자 그조차도 동화 속에 나오는 인어공주 같아서, 레이는 뺨을 붙든 그 손을 잡고 어떻게든 울음을 참아냈다.



“히로, 물거품이 되면 안 돼… 알았지? 내 곁에 있어야 돼. 절대 어디로든 사라지면 안 돼. 약속이야.”



영문을 알 수 없는 소리에 잠깐 양손이 레이에게 붙들린 채 있던 히로미츠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저 표정일 뿐이었지만, 어깨까지 들썩거리던 히로미츠가 레이에게서 손을 빼낸 후 흰 종이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레이는 왕자님처럼 생겨서 가끔 이상한 소리를 해.]
“…히로. 내가 왕자님 같아?”
[응. 머리색도, 늘 구하러 와주는 것도, 모두 다. 왕자님 같아.]


히로미츠의 위로에 레이는 그때까지 눈가에 맺혀있던 눈물을 손바닥으로 쓱쓱 닦아냈다. 해보자. 되든 안 되든 해보자. 히로미츠가 말을 못 해서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히로미츠는 발걸음이 빠른 자신을 부르지 못해 늘 뛰어오곤 했다. 그게 안타까웠다. 히로미츠의 목소리에 뒤돌아보고 싶었다. 늘 자신을 향해 달음박질하는 친구가 뛰어오지 않아도 되길 바랐다. 히로미츠가 뛰어오는 거리의 반절만큼은 마중하고 싶었다.



“히로, 눈 감아볼래?”



레이의 요청에 더 묻지도 않고 눈을 감는 하얀 얼굴의 입에 입술을 누른다. 첫키스라기엔 어색한 그 입맞춤이 히로미츠를 구할 수 있는 주문이 될 수 있기를. 나를 왕자님이라 불러주는 너를 내가 구할 수 있기를. 레이는 아주 작은 소원을 빌어보았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가기 전, 레이는 히로미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누군가를 처음으로 구해낸 레이의 세계는 내리는 눈처럼 새하얀 색이었다. 마치, 다시 태어나 처음 세상을 마주하는 순간처럼.

히로미츠가 처음 불러주는 자신의 이름은 이다지도 다정한 색이었음을.

안녕, 제로.
안녕, 히로.

앞으로 이어질 무수한 아침을 시작하는 인사를 반복하며, 둘은 웃으며 한참 내리는 눈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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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님(@Arrriiixxx)께 소원권으로 얻은 레히 어린시절 뽀쨕 뽀뽀 장면! 그려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https://twitter.com/Arrriiixxx/status/1589226970659028992?t=EbJA81BH78AaE_MlApW8pw&s=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