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아무히로] Walking on the Dream

Unknown with RSB 2022. 10. 12. 23:30

비척비척 거리를 걷는다. 고요한 거리에 울리는 것은 발소리의 그림자. 끝없는 겨울 위를 홀로 걷는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어디로 가고 싶었는지 기억할 수 없다.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면 어둠에 잠긴 하늘은 별조차 없이 무심하게 먹색을 내릴 뿐이다. 무릎이 꺾일 것 같이 휘청이며 걷던 아무로는 고개를 돌려 오른편에 있던 가게 유리창에 비치는 자기 얼굴을 본다.

자신의 왼편 귓가로부터 물들어있는 핏자국. 전면 유리창 너머로 비치는 자신의 귓가부터 목까지 선명하게 이어지는 핏물은 이 평화로운 베이커가와 어울리지 않는다. 어색하게 더듬더듬 자신의 왼쪽 얼굴을 더듬는 손에서 쇠냄새가 비릿하게 풍긴다. 고개를 내려 손을 바라보면 사물을 식별하기 힘든 밤에도 두 손은 피로 물들어 있다. 누구의 것이지?

내려다보던 손에서 시선을 떼면 눈앞에 선 고양이 같은 눈꼬리의 소유자는 의아한 기색으로 아무로를 내려다본다. 단정하고 차분하게 흐르는 밤색 머리칼 아래로 무표정일 때는 시선의 높이로 인해 다소 고압적으로 보일 수 있는 치켜 올라간 눈매인데, 아무로를 보던 그가 웃음을 터뜨리자마자 모든 게 거짓이었던 것처럼 온화하다.



“가게 앞에서 뭐 해요, 아무로씨? 설마 오늘도 빠질 생각은 아니겠죠.”
“아뇨, 그럴 리가 있나요.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빠지지 않는 거 아시잖아요.”



기다렸다는 듯 나오는 대답이, 자신이 뱉은 말 같지 않다. 아무로는 어색하게 목의 성대를 잠깐 손가락으로 눌렀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런 그의 행동이 딱히 궁금하지 않은 듯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잘 알죠. 모리 선생님이 아니라면, 아무로씨가 포아로를 빠질 일은 없다는 것 정도는 제가 더 잘 알죠.”



쾌활하게 말하며 빗질을 마무리하고 가게를 들어가려던 남자를 따라가려다, 아무로는 멈칫하고 고개를 돌려 가게 유리에 비친 자신을 확인했다. 청량한 흰 반소매 셔츠와 연 청바지는 누가 보아도 평범한 여름 옷차림이다. 이상하다. 조금 전까지 분명……



“아무로씨. 아무리 자기 얼굴이 잘생겨도 그렇게 넋 놓고 보는 건….”
“아니에요, 점장님! 이건 그냥 확인하려고-”
“네에 네에. 좋은 생각이에요, 아무로씨. 크림소다에 필요한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남았는지 재고 확인 부탁할게요.”



어느샌가 쓰레기까지 버리고 나와 가게 밖에서 유리에 비친 자신을 넋 놓고 보는 아무로에게 핀잔을 준 점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다. 변명할 여지도 주지 않은 채 사라진 그림자에 아무로는 잠깐 한숨을 내쉬고는 뒤편 식자재 창고로 발을 옮겼다.








* * *






“우리 둘이 마감하게 된 건 처음이네요.”
“…그러게요. 항상 아즈사씨가 있었죠.”
“의도한 건 아니지만 아무로씨가 항상 중간에 급한 일이 생길 때가 많으니까, 어쨌든 가게는 누군가는 봐야 하잖아요?”


어느샌가 어둑해진 바깥 거리는 하나둘 가로등이 켜졌다. 아무로는 접시를 닦으며 그 가로등 아래에 날아든 벌레들을 멀리 바라보았다. 이 계절은 여름일 텐데. 자신의 옷차림이나 가게에 틀어진 에어컨들, 끊임없이 돌아가는 제빙기의 소음. 모두 여름의 그것인데 이 풍경이 마치 짜인 무대 위의 소품처럼 느껴져 아무로는 점장의 물음을 흘려들었다.



“아무로씨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죠?”
“…네?”
“그냥… 이런 질문 듣기 싫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로씨는 무엇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잖아요. 외모도, 요리 실력도, 추리 실력도 뛰어나서 가끔… 잘 짜인 퍼즐을 보는 것 같아요.”



점장의 말에 아무로는 성의 없이 닦던 접시를 받침대에 꽂아두었다. 점장은 몸을 돌려 싱크대에 허리를 기대고, 아무로의 푸른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다소 무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질문으로 시작한 말들이다. 그런데도 낮고 속삭이는 듯 조용한 어조가 이 사람의 진심이 그렇지 않음을 전달해주었다.

아무로는 조용히 점장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각에 잠긴 옆얼굴은 새벽의 고요한 호수에 내린 베일같은 안개에 젖어 있는 듯 흐리게 슬픈 기색을 띠는 듯했다. 내리 깐 시선 아래로 보일 듯 사라지는 청회색 눈동자는 고작해야 카페의 점장과 점원 사이보다 무언가 깊은 관계라도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남자는 다시 고개를 돌려 아무로를 내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아무로는 점장이 자신의 시선을 불편해하며 눈을 깜빡일 때마다 묘하게 기분이 가라앉았다.

무언가 기대한 것일까. 확실히 선이 굵은 남자임에도 태가 고운 사람이긴 했지만 그런 기대를 품을 정도로 마음에 두고 있었는지 아무로가 다시금 고민할 때였다.



“그래서 더 이상해요. 왜 이곳에 당신이 있는지 모르겠거든요. 어디를 가도 잘 지낼 사람이, 마치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것처럼.”
“…….”



이유? 당연히 있다. 이곳이 아니면 안 된다. 아무로 토오루의 운명은 그렇게 정해져 있다. 이 포아로 내에서만 유일하게 존재할 수 있다. 이 포아로 밖에서는, 아무로 토오루여야만 하는 이유가 없다.

지켜야만 하는 것들이 있다. 너무나 많은 희생이 있었다. 두 손안에 움켜쥐지도 못할 만큼 무수한 희생을 밟고 이곳에 왔다. 언제나 지키고 싶었던 것은 그가 채 손을 뻗기도 전에 손아귀를 빠져나가 꽃잎처럼 바람 사이로 흩어져 사라졌다. 그러니 필사적일 수밖에. 매달릴 수밖에. 처절할 수밖에. 그렇게 아무로는 이곳에 반드시 필요한 퍼즐이 되어야만 했다.



“내가 너무 무례한 말들을 했군요. 미안해요, 아무로씨.”
“…아니에요. 저를 걱정하셔서 하신 말씀이니까요.”
“고마워요. 그런데 괜찮겠어요? 저야 집이 근처니까 늦게 돌아가도 괜찮겠지만, 아무로씨는 탐정 일도 병행하시는데 이렇게 늦게까지 가게에 머물러도?”
“케이크를 지켜 어린 친구들이 슬퍼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 나름으로 가치 있는 일이죠.”



점장이 냉장고에서 휘핑하기 전의 생크림을 꺼내자, 아무로는 선반에서 설탕을 꺼냈다. 싱크대 아래에서 볼(bowl)을 꺼내자 점장이 기다렸다는 듯 냉동고에서 가져온 얼음을 부었다. 넉넉하게 부어진 얼음 위로 다시 그릇을 얹고 아무로가 가져온 휘핑기를 받아들였다. 아무로는 말없이 볼을 붙잡았다.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행동들은 빈틈없이 서로를 보조했다.

아무로는 휘핑기를 움직이는 남자의 눈짓에 따라 조금씩 설탕을 부었다. 차가운 액체가 조금씩 단단해져 가는 동안 아무로는 그릇을 내려다보다가 흘끗 점장의 옆모습을 보았다. 점장은 아무로에게 아무런 관심 없이 휘핑을 단단하게 치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내리 깐 속눈썹 아래로 그늘진 청회색 눈동자를 훔쳐보던 아무로는 뺨이 달아오를 것만 같았다. 아까 전 낮은 목소리로 상냥하게 말을 걸던 것이 거짓처럼, 두 입술은 굳게 다물려있다.



“의외네요. 아무로씨는 생각보다 다정한 사람이군요.”
“그런가요. 오히려 신메뉴를 개발하려는 점장님보다는 진실에 관심이 더 많을 뿐이지만요.”
“이상하네요. 전 아무로씨가 당연히 수수께끼는 이미 풀었을 줄 알았는데요.”



돌아보지도 않고 주걱으로 생크림을 용기에 옮겨 닮은 점장은 다른 볼에 계란을 깨뜨렸다. 따뜻한 물 위에 중탕된 노른자를 거품기로 일정하게 한 방향으로 젓는다. 아무로는 조금 뜨끔해져서 싱크대 아래의 밀가루를 꺼냈다. 계량된 밀가루를 조금 단단해진 노른자에 부어 주걱으로 섞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다. 점장과 마감을 같이 하는 것도, 점장이 신메뉴를 개발하는 것도, 어느 것도 익숙한 풍경은 아닐 텐데 아무로는 마치 과거의 어느 순간을 다시 겪는 듯했다.

그 순간 속에 비치던 그림자가 점장의 것보다 어린 소년이었던 것을 제외하면. 소년과 청년의 경계에 어른거리던 그림자 위로 점장이 다시 덧씌워진다. 아무로는 말없이 조금 그리운 풍경을 다시 들여다본다. 누구를 그리워하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우두커니 남자가 예열된 오븐에 반죽을 넣는 것까지 지켜보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전기포트의 물이 끓기 시작하더니 가게 안이 수증기로 가득 찼다. 냉장고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수증기를 내려다보던 점장은 여봐란듯한 표정으로 아무로를 돌아보았다. 바깥 풍경으로 택시 한 대가 여상히 지나간다. 칠흑과 같은 어둠을 가른 엔진소리가 멀어져갈 때쯤, 적막을 깨는 오븐의 소리가 가게를 울렸다.



“탐정인 아무로씨가 몰랐을 리가 없잖아요.”
“……네.”
“하지만 아이들의 놀이에 어울려 주고 싶었던 거죠?”
“절 너무 과대평가하시는 거 아닐까요. 점장님이 힌트를 주기 전까진 알지 못했는데.”



틀에서 꺼낸 반죽을 조금 식힌 점장은 그 위에 아까 만든 생크림과 딸기, 라즈베리를 얹었다. 나이프로 케이크 가운데를 자르자, 반숙처럼 흐르는 모양새가 퍽 그럴싸해 보였다. 점장은 포크로 과일, 생크림을 함께 케이크와 떠먹었다. 고개를 갸웃한 그가 아무로에게 작은 접시에 케이크를 덜어주었다.



“단맛이 좀 강한 것 같지 않아요?”
“그러게요. 예상한 맛이랑 조금 다르네요. 그래도 이 자체로도 훌륭한 것 같아요.”



점장은 아무로가 한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선반을 열고 팔짱을 끼고 한 발짝 떨어져 고민에 잠겼다. 고민하는 옆모습을 훔쳐보고 있는데, 점장이 좋은 생각이 난 듯 아무로를 돌아보며 활짝 웃었다.



“요거트 파우더를 넣으면 될 것 같아요. 그럼 덜 달게 할 수 있어요.”
“좋은 생각이네요.”



어린아이처럼 기뻐한 점장은 작은 수첩을 꺼내 메모한 후 다시 품에 넣었다. 다시 도전해볼 생각에 상기된 뺨에 어린 분홍빛이 사랑스러웠다. 분명 이런 표정을 한 사람을 알았는데. 자신을 보며 밝게 웃어주며, 내일을 말하고 희망을 말하던 사람이 아무로에게도 있었을 텐데. 어느샌가 정리를 마친 포아로에서 점장은 아무로의 짐을 챙겨와 내밀고 있었다.

물어야 할 것이 있다.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어떻게 이곳에 존재하게 됐는지 답을 듣고 싶은 질문들이 있다. 짐을 받지 않는 아무로에 남자는 청회색 눈동자를 깜빡이더니 아무로의 오른손을 잡아 짐을 쥐여준다. 손목을 잡아, 밖으로 이끄는 남자의 팔을 되려 붙잡아 자신에게 끌었다. 당황한 남자의 눈동자가 자신을 조금 높은 시선에서 내려다본다. 떨어지려는 남자의 팔을 놓지 않았다.



“우리… 어딘가에서 만난 적 없나요.”



내내 묻고 싶었지만 묻지 못했다. 포아로 바깥에서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순간부터, 탐정단 아이들에게 한쪽 무릎을 꿇어 다정하게 시선을 맞춰주며 케이크를 대접하지 못해 미안하다며 사과하던 순간, 아이들이 사 온 다른 가게의 케이크를 나누어 먹으며 수수께끼를 풀던 시간까지, 내내 미친 사람처럼 다른 사람을 그에게서 겹쳐보고 있다.

남자는 그런 아무로의 질문에 조금 눈이 커지더니, 난처한 듯 미소를 짓는다.



“점장님은… 어릴 때 부모님을 잃으셨나요.”
“네?”
“나가노에서 살다가 왔나요. 7살 때 부모님을 잃으셨었나요? 목소리를 잃고, 치료에 차도가 없어 도쿄에 오신 걸까요. 경찰이 되고 싶진 않았나요?”



갑작스레 쏟아지는 질문에 점장은 꽤 당황한 눈치였다. 이상한 질문들이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과거를 남자에게 퍼부으며 아무로는 그 대답이 긍정, 혹은 부정인지 어떤 대답을 구하는지 알 수 없었다. 맞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아닐 것이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들이붓는 질문과 달리 아무로의 눈동자는 온기 없이 새파란 빛을 띤다.

아무로는 남자에게 다시 한 발짝 다가갔다. 둘만 있는 가게에서 아무로의 발소리가 울렸다. 흔들리던 청회색 눈동자가 또렷하게 아무로를 바라본 순간이었다.



“왜 그런 말을 해,



제로.”



그 순간, 히로미츠의 제로로서 레이는 현실로 회귀한다. 포아로의 직원인 아무로 토오루도, 검은 조직의 정보상인 버번도, 공안의 지휘관인 후루야 레이도 아닌 오롯이 히로미츠의 제로로서 마주한다. 다시 내려다본 손 위에는 두 손 가득, 고개를 돌려 거울로 마주한 자신의 왼편 귀 쪽에 가득한 핏물에서 쇠 비린내가 난다. 히로미츠의 제로는 여전히 칼처럼 몸을 에는 겨울의 페이지에서 헤매고 있다.



“꿈인 거야?”
“네가 바라는 소원이자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과거.”



희미하게 휘파람 같은 바람 소리에 고개를 든다. 히로미츠의 왼편 가슴팍으로 끊임없이 흐르는 피가 다시 그의 몸 아래로 흐르고, 흐르고, 흘러서. 이 겨울에 너는 춥지도 않은지 얇은 셔츠 하나만 입고서 네 심장을 쏘고. 싸늘하게 식어가는 주검 아래로 끊임없이 흐르는 피가 레이의 두 손을, 뺨을 적셨다.

구하고 싶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널 구하고 싶었다.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이루어질 수 없는 과거를 바라고 바랐다. 네가 세상에 있는 모습을 그리면서, 네가 가장 너다울 때의 모습을 내가 구현해내길 바라면서.

아무로는 가장 고귀한 너의 모습이자 가장 추악한 내 이기심을 닮았다. 너로 만들어진 아무로를 너는 영원히 알 수 없다. 그게 언제나 조금 우스워서, 자신을 죽여서라도 널 내 곁에 두고 싶었다. 내 위에 너를 덧그려서라도, 너를 나로서 만들어 태양 아래에 숨 쉬게 할 수만 있다면. 뭍 위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내 폐를 태워서라도 너를 살릴 수만 있다면 나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제로. 내 곁에 왔잖아. 그걸로 충분해.



웃으며 말하는 히로미츠의 눈물이 땅에 떨어진 순간, 레이는 이 모든 것이 자신이 만들어낸 거짓이 아님을 깨닫는다. 죽어서도 바랄 수 없는 용서다.

네가 아니고서야 그런 말을 감히 내게 베푸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을 테니까.

부서져 가는 시신을 품에 안고 그 심장에, 손에 입을 맞춘다. 모든 것은 하나의 연극처럼 막을 내린다. 나는 여전히 늪과 같은 사랑 속을 허덕이면서 걸어가겠지. 그것은 아주 고통스럽고 지옥 같은 찬란한 삶일 것이다.





눈을 뜨면 고요한 병실은 희미한 보조 등의 불빛 외에 어떤 빛도 없다. 레이는 고개를 돌려 병실 바깥 저 멀리서 빛나는 경시청의 불빛을 보았다. 그 너머 희미하게 밝아오기 시작하는 새벽은 꿈속의 연인과 같은 눈 색을 하고 있다. 될 수 있는 한 계속해서 잇고 싶은 꿈과 같은 색을 한 새벽 속에, 레이는 오래도록 그 색을 마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