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히로] 눈 속의 비밀
오랜만에 본가에 들렀다. 그 후로 시간이 꽤 흐른 것 같은데도 여전히 자신의 방만큼은 예전과 꼭 같은 모습이다. 치우지 않은 걸 다행이라 해야 할지, 쓸데없이 넓기만 한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덕에 방이 많아 자신의 방이 남아있으니 그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들릴 생각 없던 곳에 들린 이유는 하나다. 이제는 잊힌 시간 속에 남겨져 있을 조각의 증거를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공안과 휴가란 퍽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지만, 집무실까지 불려 가서 과로로 죽은 시체를 치울 생각은 없다고 엄포를 놓는 쿠로다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그 자리에서 휴가 신청서를 직접 쓰게 해서 받아갈 줄 누가 알겠냐고. 하여간 공안 인간들이 하는 일처리가 다 그렇다. 죄다 제멋대로 상대방 의사는 생각도 안 하고 잡아가서 일단 시키기부터 해댄다. 누가 누구에게 하는 욕인지도 모를 생각들을 하며 레이는 오랜만에 들린 다다미 방의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이래서 오기 싫었다. 이 방의 어디든 히로미츠의 흔적들이 가득하다. 친척 아저씨네 집에서 레이를 머무르게 하기엔 어린 소꿉친구라도 불편해하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레이는 어릴 때부터 히로미츠에게만은 무른 아이였어서, 자주 자신의 방으로 히로미츠를 데려오곤 했다. 창문을 열면 보이는 정원에 비가 오고 눈이 오던 그 모든 시절을 함께했던 사람. 이제 다시는, 레이의 곁에 돌아올 수 없을 그를 떠올리는 것은 행복했지만 동시에 너무 괴로운 일이기도 했으므로.
레이는 책장에 꽂힌 책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훑었다. 어린 시절 할 일이 없어 의미 없이 넘기던 책들 사이로 한 권의 책이 집힌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그 페이지를 성의 없이 넘기다 보면 조그만 지하철표 하나가 떨어진다. 이제 다 큰 레이의 손가락 두 마디쯤 되는 길이의, 더 이상 사용할 수도 없는 종이로 된, 도쿄역으로 가는 지하철표.
그 시간이 적힌 기억 속으로, 찬찬히 눈을 감으면, 열려있던 창문 밖으로 부는 겨울의 바람이 레이의 머리카락 사이로 나부낀다.
* * *
-20년 전 여름, 도쿄
저녁을 먹고 일기를 쓴 두 아이는 밤이 되자 불을 꺼준 어른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 나란히 잠에 든다. 방학이 되어 레이가 히로미츠의 집에 놀러 온 덕에, 둘은 드물게 하루종일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역시 히로미츠와 노는 게 제일 재밌다. 레이는 눕기는 했지만 옆자리에서 피곤했는지 금세 잠이 든 히로미츠와 달리 천장에 붙여져 있는 야광 별스티커들을 하나씩 헤아리고 있었다. 저건 북극곰자리, 이건 처녀자리, 그리고 저건…
한참 별을 보며 내일은 히로미츠와 무얼 하며 놀지 생각하는데 옆자리에서 가늘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놀라 돌아보았다.
“엄마… 아빠……”
“…….”
레이도 안다. 마을 사람들이 히로미츠만 보면 혀를 쯧쯧 차면서 불쌍하다고 말해대니 모를 수가 없다. 어른들만 그럴까. 아이들도 레이가 없는 동안은 히로미츠를 괴롭혀댔다. 무슨 말만 하면 나가노 말투가 웃기다면서, 말 좀 더 해보라 하질 않나, 나가노에 너네 부모님 찾으러 가라면서 히로미츠가 대꾸할 때까지 말을 시키질 않나. 레이가 오면 찍소리도 못하고 뿔뿔이 흩어지곤 했다.
레이는 식은땀을 흘리며 우는 히로미츠를 깨워 품에 안았다. 어깨가 다 젖어가도록 우는 히로미츠의 등을 토닥이면 그 옛날 조그만 참새가 다친 채로 레이의 손바닥 위에서 가느다랗게 떨던 기억이 난다. 귀가 아프도록 울던 참새는 다른 손바닥으로 그 위를 가만히 덮어주자 그제야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로 울며 레이의 손 위에서 잠들었었다.
레이는 히로미츠가 진정할 때까지 등을 쓸어주다가 불현듯 말을 꺼냈다.
“히로. 나가노 갈래? … 아니, 가자. 나가노에 가자.”
“……나… 가노에?”
기대하는 소꿉친구의 눈동자 속에는 무수한 별이 있다. 레이는 씩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고개를 끄덕이는 히로를 칭찬하듯 머리를 쓰다듬고 눕혔다. 어린아이를 재우는 것처럼 가슴팍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고 도닥인다. 이럴 때는 어린아이 취급해도 히로미츠가 화내지 않는다.
어차피 바깥에서 11살을 어른으로 보지도 않을 텐데, 어린아이를 어리게 본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화낼 일도 아닌데. 말로 하지 못할 생각을 하면서 다시 잠에 빠져든 친구의 얼굴을 본다. 나가노에 갈 방법을 궁리하며 레이도 그 옆에서 한번 하품을 하고 잠에 들었다.
도쿄에서 나가노까지 대략 243km. 구내 도서관과 도서관 내의 컴퓨터를 이용해 찾아본 결과 도쿄역에서 기차를 타고 나가노에 가기로 결정했다. 그때까지는 긴가민가하던 히로미츠도 레이가 도서관의 프린트 카드를 이용해 관련 자료들을 출력하자 정말 갈 수 있을 거란 기대로 눈이 반짝였다.
소꿉친구의 눈동자 속에 흐르는 은하수는 언제나 레이를 설레게 했다. 함께 도서관 바깥에 있는 벤치에서 종이 위로 형광펜을 그으며 얼마의 시간이 걸릴지, 가서 어떻게 히로미츠의 집을 찾으러 갈지 그런 것들을 골몰하는 것은 스스로가 대단한 사람인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11살짜리의 세계는 아주 크고 동시에 아주 작았다. 히로미츠의 기대로 부푼 뺨, 반짝이며 레이를 바라보는 눈동자, 그런 것들은 항상 레이를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만들었다.
떠나기로 한 날 아침, 작은 배낭을 메고 역 앞에 서 있으면 조금 늦게 히로미츠가 달려왔다. 이번 여행은 어른들에게는 비밀이었다.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히로미츠에게 거짓말을 시키기엔 조금 미안했지만, 분명히 더 크고 난 후에 가라고 말릴 게 뻔했다.
지난번 히로미츠가 형과 통화한 이후 펑펑 울어 이유를 물으니, 아직 어린 히로미츠가 나가노에 오는 건 안 된다고 엄하게 혼이 났었다고 했다. 나중에 데리러 갈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지만 그 이후로도 히로미츠네 형이 히로미츠를 만나러 오는 일도, 데리러 오는 일도 없었다.
괜찮다. 어차피 지키지 못할 약속이라면 이쪽에서 지키면 될 일이다. 레이는 만나지도 못한 히로미츠네 형이 거짓말쟁이라고 생각했다. 분명 히로미츠와 다르게 아주 심술궂고 못 되게 생겼을 거다. 그러지 않고서야 하나뿐인 남동생이 형이 보고 싶다는데 그렇게까지 냉정하게 말할 이유는 없으니까. 심지어 지난번엔 한 달에 한 번만 통화하라고 혼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친형이 아닌 게 틀림없다. 히로미츠가 슬퍼할게 마음 아파서 말하진 못했지만, 친형이라기엔 너무 냉정하다.
차라리 히로미츠와 내가 형제였다면 정말 좋은 형이 될 자신이 있는데. 아니, 그럼 결혼을 못 하니까 안 되지. 이건 보류다.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가 히로미츠와 함께 도쿄역으로 가는 종이표를 끊었다. 아이 둘은 그때까지 저금통에 모았던 용돈을 탈탈 털어서 며칠 전에 은행에서 종이돈으로 바꾸었다. 저축하지 않고 가져간단 말에 미심쩍어하는 은행 직원에게서 돈을 가져와 봉투에 넣어 오늘 아침까지 곱게 보관했다.
도쿄역까지 도착한 둘은 두 번째 난관에 도달했다. 신칸센 표를 사려고 했지만 표는커녕 역무실로 잡혀갈 뻔한 것이다. 미성년자에게는 표를 팔지 않는다며 직원과 실랑이를 벌이던 레이는 직원이 역무원에게 아이의 부모님을 찾아봐야겠다며 말하는 것을 듣자마자 그 길로 기다리던 히로미츠의 손을 잡고 냅다 뛰었다.
어쩌지, 난감해하는 레이에게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고 히로미츠가 먼저 말을 꺼냈다. 둘은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는 말은 않지만 자신에게 실망했을 히로미츠에게 말을 거는 게 무서웠다. 자리에 앉아 배낭을 쥔 레이의 손을 히로미츠가 덮었다.
역에서 내려 한참을 걷던 히로미츠의 손을 잡아챈 레이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신사로 향했다. 저 멀리 있는 산까지 한눈에 보이는 그 신사 구석에는 동서남북의 나침반이 바닥에 그려져 있었다. 커다란 나침반에 쓰인 나가노란 글자 위에 선 레이가 멀리 손가락 끝을 가리키며 외쳤다.
“언젠가, 내가 히로를 꼭 데리고 저기로 갈게. 약속할게.”
“응. 믿어. 데려가줘.”
새끼손가락 끝을 마주 걸고 약속했다. 약속이라기보단 레이에겐 다짐 같은 것이었다. 언젠가는 널 그곳에 내 손으로 데려가주겠다고. 그때가 언제가 되더라도, 우리의 관계가 어떻게 변하더라도, 내가 널 데려다줄 거라고.
그렇게 11살의 여름방학, 짧은 여행은 끝을 맺었다.
* * *
잊고 있던 어린 날 방학 속의 자신이 했던 약속을 이제야 지키는 나라도, 너는 용서해 주겠지만.
레이는 나가노역에서 내려 공안이 준비해 준 차에 올라타 히로미츠가 살았던 마을로 향했다. 고속도로 위에 떠오르는 태양은 어린 시절 히로미츠와 보던 그 여름방학 아침의 것과 꼭 같다. 일렁이는 빛이 부서져내리는 창밖은 도쿄의 풍경과 달리 끝없는 산으로 이어져있다. 함께 도쿄에서 바다에 갔을 때 그렇게 좋아했었다. 하기야 천성이 어느 곳에서건 긍정적인 면을 기어코 찾아내는 너라면 도쿄가 바다와 가깝든 멀든 좋은 점을 알려줬겠지만.
그때와 다른 점이라면 가히 설국이란 별칭에 어울리게 하얀 눈으로 가는 곳마다 뒤덮여 있단 점이랄까. 행선지가 나가노란 말에 퍽 낭만적인 면도 다 있군, 라며 비꼬는 쿠로다에게 아무렴, 관리관님 정도는 아닐 거라 받아쳤었다.
도착한 마을은 작고 소담하다. 이 풍경 속에서 네가 무탈하게 자랐다면 어떤 풍경이었을까. 가정이란 의미 없음을 누구보다 뼈저리게 알면서도 만약이란 이름을 굳이 붙이게 되고 만다. 이래서야 상사에게 낭만적인 남자라고 비아냥당해도 할 말이 없다. 물론 그렇다한들 레이에게 아무런 타격은 없었지만.
먹고 싶었던 신슈소바도 먹었고, 히로미츠가 나온 조그만 초등학교에도 들릴 수 있었다. 임시로 만들어준 경찰 신분증을 꺼내니 큰 어려움 없이 들어올 수 있었다. 천장에 키가 닿을 듯 낮은 초등학교는 고작해야 2층의 작은 건물 여러 개로 이뤄져 있었다. 그 작은 학교 안 복도를 거닐면 어린 시절의 히로미츠가 복도를 뛰어 레이의 곁을 스친다.
어쩌면 그게 히로미츠가 가져야 할 당연한 것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가족들과 함께 아버지가 근무하는 초등학교에서 졸업하고, 나가노에 있는 중, 고등학교를 자전거로 통학하며 보냈을 일상. 너는 내가 창밖으로 보며 지나쳤던 작은 버스 정류장에서 한 시간에 한 번씩 오는 버스를 타고 도시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저 라디오로만 듣는 그런 삶을 사는 게 맞았을지도 모른다.
교정으로 나와 운동장 위에 소복하게 내린 눈 위를 밟으면 뽀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눈이 밟힌다. 겨울마다 눈이 내리는 교정을 지나 교실에 들어서서 친구들에게 눈이 너무 많이 와 힘들었다고 투덜거리는 그런 보통의 삶. 비록 그 안에 내가 없다 하더라도, 네가 누릴 것들은 모두 그곳에 있었을 텐데.
모로후시의 가족묘를 찾는 것은 히로미츠의 장례식 이후로 두 번째다. 시신도 없을 묘의 아래에는 레이가 보내준 스마트폰이 유골함에 담겨 있을 것이다.
싸라기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묘 위를 가볍게 털고 청소한 후 가져온 라일락을 묘에 두었다. 겨울에 라일락이라니, 우습긴 하지만 그래도 히로미츠에게 가장 어울리는 꽃이니까 이 정도는 그도 봐줄 것이다. 비처럼 내리기 시작하는 눈을 맞으며 주머니에서 종이표를 꺼내 라이터를 꺼냈다.
이제 불을 켜서 그에게 보내주기만 하면 된다. 레이는 답지 않게 손이 헛돌아 불이 켜지지 않는 라이터를 보았다. 비처럼 내리는 눈 때문인지, 겨우 불이 켜졌음에도 차마 종이 끝에 그 불을 붙이지 못했다. 다시 꺼져버린 라이터와 종이를 마주 본 레이는 조용히 라이터를 라일락 옆에 두었다.
미안해. 이것만큼은 마음이 아파서 네게 보내지 못할 거 같아.
레이는 차마 태우지 못한 종이가 젖어드는 것을 보았다. 그게 내리는 눈이었는지 아니면 흐르는 눈물이었는지, 둘 다였는지. 그 답은 나가노의 겨울에 묻어두기로 했다.
다시 레이의 지갑 속에 있을 그 기차표는 언젠가의 방학에 나가노에 와서 돌려주기로 한다. 상냥한 그의 소꿉친구는 레이의 그런 결정도 기꺼이 기다려줄 것이 분명하니까.
후루야 레이의 31살의 겨울은 그제야 겨우 다정한 온점을 찍는다.
* * *
“카자미. 선물이다.”
보고서를 쓰고 있던 남자의 책상 위에 나가노의 명물인 메밀 소바면이며 사과로 만든 쿠키 따위가 놓인다. 쿠키야 먹을 수 있지만 소바면은… 아니, 가족들이 아주 좋아하겠네요. 곤란해하며 말하면 건강 좀 챙기라는 잔소리가 덤으로 따라온다. 메밀의 효능을 덧붙여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잔소리에 타이밍만 보던 카자미가 질문을 던진다.
“휴가는 잘 다녀오셨습니까?”
“음, 아주 즐거운 방학이었어.”
갸웃하는 카자미를 두고 떠나는 상사의 뒷모습이 기분 좋아 보여서,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기로 했다.
곧 돌아올 봄에는 도쿄 거리 모퉁이에서도 라일락 향기를 맡을 수 있는 밤이 올 것이다. 그 향기 속에 아주 작은 추억을 지갑 속 기차표에 숨겨둔 남자에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