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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카히로] 거짓말쟁이와의 티타임 in Tokyo (2/2) Edit ver.
    거짓말쟁이와의 티타임 2020. 12. 29. 23:49

    가을이 지나고 겨울이 왔다. 히로미츠는 종종 거리에서 반짝이는 금발을 본 것 같기도 했다. 그런 머리카락은 후루야밖에 일본에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흔한 색인지도 모른다.

    가끔 친구들을 만나 후루야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다들 5년이 넘도록 연락없는 그에게 섭섭함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혹시 모르지. 그 강직한 성격에 무슨 조직에라도 잠입 중인 걸지도?"란 하기와라의 장난스러운 추측도 있었다. 전부터 날카로운 면이 있었으니 아주 틀린 추측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에 그렇게 목숨까지 걸어 잠입해야 되는 조직이 있을 리가 없다. 그런 마츠다의 반론에 히로미츠도 무슨 영화도 아니고, 라며 긍정했다. 하기와라는 다테에게 왜 다들 자신의 말을 믿지 못하냐며 매달렸지만, 다테도 차라리 일본에서 폭탄테러가 일어났다는 말이 신빙성 있겠다며 그를 무시했다.

    그날 모임은 삐진 하기와라를 달래는 걸로 끝이 났다.








    최근 히로미츠는 고민이 생겼다. 남자친구라고 부르기엔 어정쩡한 관계인 스바루의 두문불출이 더 심해졌다.

    원래도 논문이나 연구로 바쁜 사람이긴 했다. 하지만 겨울이 되니 히로미츠는 스바루의 얼굴이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게다가 아무리 일본인의 연애속도에 맞추겠다고 다짐했지만 반년이 가까워지도록 진도가 키스에서 멈춰있었다. 히로미츠는 속이 상했다. 외국에선 일주일에 한 번은 대시 받았었는데, 일본이라 그저 수염 난 아저씨가 된 기분이었다.

    아니, 수염 난 아저씨긴 하지. 29살의 키가 180을 넘는 남자가 뭐가 좋다고 스바루가 매달릴지 히로미츠 스스로도 의문이었다. 어쨌거나 공대 대학원생에 27살이니 미래도 탄탄대로일 텐데.

    심지어 이젠 히로미츠가 키스 중에 허벅지로 손을 옮겨도 스바루가 깍지를 껴 저지하는 중이었다. 너무 자연스러워서 한두 번은 넘어갔지만, 그것도 세 번째면 모르는 게 이상하다.

    역시, 처음에 그저 분위기에 휩쓸려 키스했던 게 문제다. 그때는 슈이치 생각에 혼란스러워서 제대로 생각하고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한 히로미츠는 다음을 기다렸지만, 스바루는 또 연락이 끊겼다. 그리고 히로미츠의 인내심도 같이 끊겼다.


    [너무 바빠서 미안해요. 이번 연구와 논문만 끝나고 다시 연락할게요.]

    [오키야씨, 우리 시간을 가져요.]


    이름으로 안 부른 건 조금 심했나, 생각했다. 하지만 애초에 연인으로 시작한 관계도 아니었다. 모든 것이 구렁이 담 넘어가는 듯한 관계였다. 히로미츠는 단 한 번도 쿠도 저택에 들린 적이 없었고, 그의 연구실 근처에 가본 적도 없었다.

    이해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무리시켜서 잇는 관계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헤어지자는 말을 할만한 관계도 아니다. 그렇게 생각한 히로미츠가 휴대폰을 구석에 처박고 침대에 누웠다.


    ♪♬♩-♪♬♩-


    히로미츠는 이불 속에서 고개만 들어 휴대폰을 확인했다. 밤 12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그 사이에 짧게 잠이 든 모양이다. 히로미츠는 눈을 비비고는 어쩐지 다급한 벨 소리에 안전바를 걸고 문을 열었다.

    눈이라도 맞으면서 달려온 건지, 머리와 어깨에 한가득이었다. 침착해 보이지만 입김이 거친 것이 뛰어온 것 같았다. 히로미츠는 팔짱을 끼고 벽에 기대 삐딱하게 그런 스바루를 바라보았다.


    "뭐에요? 바쁘다면서요."

    "히로미츠씨, 우리 얘기 좀 해요."

    "무슨 얘기요. 거기서 하세요."


    스바루는 입을 다물었다. 히로미츠는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스바루의 새파란 안색에 밖에 세워 두기엔 마음이 안 좋아 결국 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와요. 추우니까."


    안전바를 열고 얼음장 같은 손을 잡아끌었다.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껴안는 남자에게 히로미츠는 오히려 화가 났다. 이 사람 나하고 뭐 하고 싶은 거야? 이렇게 드물게 만나는데 좋아하면 당연히 닿고 싶은 거 아닌가?


    "스바루씨, 난 당신이 동성애에 거부감이 있는 줄로만-"


    말을 이으려던 히로미츠가 자신을 덮치듯 현관복도에 밀어뜨린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히로미츠는 눈살을 찌푸렸다. 현관에 있는 센서 등이 역광이라 스바루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안경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당황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게 무슨-"이라 말하며 항의하려던 입을 스바루가 집어삼켰다.

    히로미츠는 스바루가 늘 잔잔한 물 같은 사람이라 여겼다. 어떤 돌을 던져도 파문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았다. 히로미츠는 혼란스러웠다.


    "지고는, 못 살아서요."


    스바루의 목소리가, 왠지 끓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토록 침착하고 평온하던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히로미츠는 남자의 눈 아래 자신이 마치 피식자 같았다. 반항할 수 없었다. 열기에 집어삼켜질 것 같았다.

    한 번도 자신이 이 사람의 잔잔한 수면에 파문을 일으킬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늘 미지근하던 스바루의 끓는 점을 일으키는 촉매가 될 거라 생각한 적 없었다. 히로미츠는 어이가 없어져 웃음을 터뜨렸다. 그대로 스바루의 뺨과 이마에 입을 맞췄다.


    "우리 둘 다 참고 있었나 봐요. 어... 스바루씨..."

    "침대로 가죠."


    스바루는 그대로 히로미츠의 등과 오금 아래에 팔을 넣어 들어 올렸다. 히로미츠는 갑자기 들려 높아진 시선에 당황해 남자의 목을 껴안았다. 몇 번 집에 와봤던 터라 남자는 헤매지도 않고 바로 히로미츠의 침대로 그를 내려놓았다.


    "알았으니까! 우리 사귀는 거 맞으니까!"

    "맞아요. 사귀는 사이. 그러니까, 걸맞은 일을 해야죠. 안 그래요?"


    히로미츠는 스바루의 키스를 받으며 이건 완전 사기라고 생각했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다음 날 아침에 히로미츠는 너무 울어 빡빡한 눈을 억지로 깜빡이며 잠에서 깨려 노력했다. 히로미츠는 옆에서 자는 척하는 남자의 귀를 잡았다.


    "너, 아카이 슈이치지?"

    "......"


    들리는 건지 들리지 않는 건지, 히로미츠는 스바루의, 아니 슈이치의 귀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 귀에 대고 다 쉰 목소리로 소리 질렀다.


    "내가, 못 알아볼 줄 알았어?! 이 사기꾼 새끼!!!"

    "아니... 저는 오키야 스바..."


    그제야 꿈지럭대며 일어나는 척하는 뻔뻔한 남자의 모습에 히로미츠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지금까지 오키야 스바루 앞에서 했던 아카이 슈이치에 관한 이야기들이 떠올랐다. 히로미츠는 당장이라도 슈이치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잊어버리라고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아파트의 다른 주민들을 생각해 겨우 참았다. 히로미츠는 이를 악물었다.


    "또 그딴 개소리하면, 두 번 다시 너랑 안 볼 줄 알아. 뭐? 27살? 대학원생??"

    "미안하다... 난 진짜 널 위해서..."

    "아아, 그랬어~? 그러면 최소한 이 꼴로 나랑 사귀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오키야 스바루씨?"

    "히로... 그래서 끝까지는 안 하려고 했었다..."


    변명이랍시고 하는 말에, 히로미츠는 너무 화가 나 손발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렇게까지 화난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너 죽은 줄 알고 우는 나 보면서, 재밌었냐? 일 다 끝나고 원래 꼴로 못 올 거면, 하, 아니다. 나가. 당장 나가. 다 해결하고 와, 알았어?!"

    "아니... 그... 알겠다."


    그렇게 오키야 스바루는, 아니 아카이 슈이치는 히로미츠의 집에서 쫓겨났다.







    카페는 평화를 되찾았다. 그리고 12월이 다 지나 새해가 됐다.

    한동안 뉴스는 무슨 건물이 무너졌다, 폭발했다, 불타서 없어졌다는 내용이 자주 나왔다. 저거 다 지으려면 돈이 얼마야, 히로미츠는 턱을 괴고 지루하게 뉴스를 보았다. 그동안 슈이치는 코빼기도 안 보였다.

    다 해결하고 오랬지, 누가 잠수타랬나. 하여간 이 인간은 무슨 말만 하면 곧이곧대로...

    히로미츠는 구시렁거리며 슈이치를 욕했다. 그러다 아, 그 사람이랑 사귀는 게 나였지! 하면서 신년 라디오와 히터 소리만 나는 가게에서 혼자 테이블에 머리를 박았다. 웃음이 나는데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슈이치가 보고 싶었다. 그가 스바루일 때 렌즈 때문에 좋아하는 연둣빛의 눈동자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여름 청포도 같은 눈동자는 히로미츠가 가장 좋아하는 슈이치의 색이었다.

    그 인간 얼굴에서 봐줄 만한 게 눈동자랑... 코랑... 입술이랑... 턱이랑... 머리카락... 몸도... 히로미츠는 그렇게 아무도 없는 밤의 카페에서 궁상을 떨다 테이블에 다시 머리를 박았다. 이놈의 외모지상주의 죽자! 죽어!

    한동안 시무룩하게 테이블 위에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던 히로미츠는 밖이 시끄러워서 몸을 일으켰다.


    "자네가 왜 따라오는 건가?"

    "제 친구가 하는 가게에 제가 오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지긋지긋한 비니를 쓴 슈이치와 오래전 헤어진 후루야였다. 둘 다 비현실적이라 히로미츠는 눈가를 비볐다.

    뭐지... 왜 저 두사람이 같이 오는 거지...


    "제로...?"

    "히로!!! 보고 싶었어, 진짜!!!"

    "진짜 제로구나!!!"


    히로미츠는 거의 6년만에 보는 소꿉친구의 모습에 눈물이 핑 돌았다. 후루야도 같았는지 히로미츠의 앞에서 눈물을 글썽거리고 있었다. 누가 뭐랄 것도 없이 둘은 서로를 껴안았다. 한참 그렇게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재회를 하는데 옆에서 슈이치가 둘을 떼려 애썼다.

    히로미츠는 그런 슈이치를 무시하고 후루야를 품에 안고 등을 토닥거렸다. 마치 오래 떨어진 아들이라도 만난 아빠였다. 슈이치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둘이... 이렇게까지 오래 안을 정도로 친한 사이인 건가...?"

    "당연한 거 아닙니까, 우린 어릴 때 결혼을 약속했었다고요!"

    "엣, 제로, 무슨,"

    "히로오, 우리 약속을 잊은 거야?"


    슈이치는 골이 아파졌다. 나가노의 형님도 만만찮아 보였는데 여기 최종보스가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슈이치는 히로미츠의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당신 지금 우리 순진한 히로한테 무슨-!"

    "자네의 순진한 히로군은 이미 나하고 이렇고 저런-"


    히로미츠의 배 위에서 내려가려던 슈이치의 손이 히로미츠에게 붙들렸다.


    "슈이치..."


    히로미츠가 슈이치의 손을 아프도록 꽉 붙들었다. 웃으면서 말하지만 슈이치는 안다. 이건 결코 좋은 사인이 아니다. 히로미츠가 웃으면서 화낼 때는 건드리면 안 된다. 슈이치가 그런 히로미츠의 눈치를 보며 억지로 입꼬리를 올렸다.

    히로미츠는 둘을 억지로 뗐다. 둘을 의자에 앉힌 후 가게의 사인을 클로즈로 바꾸고 블라인드를 내렸다.


    "둘 다, 서로 앉아서 얘기해. 남의 가게에서 서서 행패 부리지 말고. 알았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묘하게 즐거워 보여서, 슈이치와 후루야는 서로를 탐탁지 않게 쳐다보면서도 이야기를 시작했다. 셋은 히로미츠의 몽블랑을 먹으면서 그동안 밀렸던 이야기를 했다. 밖에는 어느새 눈이 소복소복 쌓여갔다.



    <in Tokyo 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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