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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이히로아카] Let me be your valentine!
    단편 2021. 2. 27. 00:19

    아침의 전철은 학교에 가려는 학생들과 직장인들로 만원이다. 2월 초, 아직은 코끝에 시린 기운이 감돈다. 후루야는 평소와 달리 늦게 나온 탓에 사람이 가득 찬 전철에 서 있는 것이 맘에 들지 않았다. 늦게 나온 탓에, 히로미츠는 궁도부 연습으로 이미 가버렸다.


    너무해, 진짜. 하루쯤은 빠져도 되잖아.


    투덜거리면서도 히로미츠가 어울린다고 말한 웨이브 머리를 위해 아침부터 고데기로 머리를 말았다. 소학교 6학년 때, 담임이던 여선생을 보고 넋을 잃길래 툴툴 거렸더니, 대뜸 ‘제로한테 어울릴 거 같아’라며 집에 데려가 서툰 손놀림으로 머리를 만져줬었다.


    빈말로도 잘했다고 하기엔 무리였지만, 거울로 비치는 히로미츠가 예쁘다고 칭찬하며 웃는 게 너무 좋아서, 그 후로 늘 머리를 말고 양 갈래로 묶는 스타일을 고집해왔다.


    물론 히로미츠는 기억도 못 하겠지만, 그 정도는 아내 될 사람으로 참아줄 수 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중학생 때처럼 테니스부에 들 줄 알았는데, 무슨 바람이 분 탓인지 갑자기 궁도부에 들어갔다. 이유는 안다. 맘에 안 들어. 하나부터 열까지 짜증 나는 그 여자. 히로미츠가 첫눈에 보고 예쁘다며 시선을 떼지 못한 그 여자 때문이다. 전철 문 근처에 선 후루야는 창밖의 풍경을 흘려보며 거슬리는 여자를 머리 속에서 지워냈다.




    “야, 저기 봐.”
    “…얼, 대박.”
    “미친, 존나 예뻐.”




    아침부터 기분이 별로다. 저 지긋지긋한 칭찬을 가장한 병신같은 멘트들. 들으라고 말하는 게 뻔히 보이잖아. 참신하지도 않고 개성도 없다. 전부 탈락. 목에 두른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히로미츠가 짜 준 목도리는 어릴 때부터 후루야가 겨울마다 쓰는 아이템이다.


    제로는 흰색이 잘 어울려, 라며 떠 준 깨끗한 아이보리 색의 목도리를 두르면 언제나 히로미츠와 있는 기분이 든다. 히로미츠는 후루야가 목도리를 좋아하는 거라 생각하지만, 목도리를 뜰 때 옆에서 지켜본 기억을 좋아하는 것은 모른다. 아주 어릴 때부터의 비밀이니까.


    기분이 좋아져서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는데 갑자기 열차가 덜컹거린다. “우리 열차는 앞서가는 열차와의 거리를 유지하기 위해…” 지루한 말을 한 귀로 흘려듣는데 남자들뿐만 아니라 여자애들까지 이쪽을 흘끗거린다.




    “안녕.”
    “…아, 네.”




    아침부터 진짜, 되는 일이 없다.


    후루야는 눈앞에 선 여자를 심드렁하게 바라보며 대꾸했다. 후배의 다소 성의 없는 대답에도 별 반응 없이, 검은 긴 생머리를 늘어뜨린 소녀는 잠깐 눈을 깜빡인 후 다시 창밖을 내다본다. 하필 강 위를 건너다 멈춘 탓에, 바깥 풍경에 반사된 빛이 반사판처럼 소녀의 얼굴을 밝혔다. 눈이 부시지도 않는지 멍한 표정으로 밖을 보는 여자에, 주위는 더욱 소란스럽다.


    아침부터 인근 공립학교의 학생 중 명물 두 명이 한 전철칸 안에 탄 덕이다. 귀여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글래머러스한 몸매로 유명한 후루야는 말할 것도 없지만, 차분하고 냉랭한 그림 같은 미녀로 유명한 아카이 슈이치까지 한 장소에 있는 것은 드문 탓이다.


    차분하고 냉랭은 무슨, 이 여자는 그냥 멍한 거라고. 아무 생각도 없고, 머리 속이 꽃밭인데 뭐라는 거야. 후루야는 조금 삐죽거리며 아카이를 노려보았다. 그런 시선을 눈치챈 건지 관심이 없는 건지 열차가 다시 움직이고 목적지에 다다를 때까지 아카이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정문에서 인사하는 선도부에 성의 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표시라도 하는 후루야와 달리 아카이는 모두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그조차도 히로미츠는 단지 서투를 뿐이라며, 영국에서 와 아직 일본 문화에 익숙하지 않아 그런 걸 거라 곤란한 듯 후루야를 달랬다.


    그럴 리가 없잖아. 영국이라도 인사 정도는 해. 바보 히로.


    사람에게서 단점을 찾기보다 장점을 찾고 예뻐하는 히로미츠라서 좋아하게 된 거지만, 모두에게 상냥한 사람을 좋아하는 건 생각보다 속이 상할 때도 많다.


    게다가 저렇게 다 읽힌다. 후루야가 히로미츠에게 말해도 씨알도 안 먹히는 걸 안 이후로 아카이는 약 올리듯 후루야의 앞에서 본색을 드러냈다. 셋이 있을 때 연약한 척 하며 안기는 아카이를 아는 후루야만 속이 터진다.




    “히로는 연습하러 갔어요.”




    결국 말을 붙이는 건 후루야다. 선배 너무 미워하지 마, 라면서 머리를 쓰다듬은 히로미츠 생각이 나서다. 안 그래도 귀여운 얼굴 탓에 여동생 취급하는 것도 지겨운데, 이 여자가 가서 이르기라도 하면 곤란하니까. 겸사겸사 소꿉친구의 특권인 별명으로 히로미츠를 칭하며 견제하는 후루야를 아카이가 흘끗 보았다.




    “그렇구나. 열심이네, 아가가.”
    “…뭐…?”
    “아아, 후루야군은 모르겠구나. 궁도부에서 이번 학기부터 선후배끼리 자매를 맺기로 해서.”




    뭐라는 거야. 그런 거 처음 들어.


    말도 잇지 못하고 아카이를 손가락질하며 입만 뻐끔거리는 후루야를 돌아보며 미소 짓는다.




    “그래서, 나랑 아가가 자매. ‘내’ 여동생과 늘 친하게 지내줘서 고마워, 후루야군?”




    다시 새침하게 몸을 돌리는 덕에 까만 머리칼이 바람결에 찰랑이며 흔들렸다. 어느새 궁도부 쪽으로 사라져가는 아카이를 망부석처럼 자리에 서 손가락질하던 후루야가 결국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이 빌어먹을 양키가!!!! 내 일본에서 당장 나가!!!!”




    뒤에서 울려 퍼지는 고함에 아카이는 남들에게 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후루야를 돌아보며 혀를 내밀었다.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는다. 후배라고 져줄 생각도 없다. 아카이는 연습시간이 끝나기 전 히로미츠를 보러 가기 위해 걷는 속도를 높였다.


    얌전한 얼굴과 어울리지 않게 빠른 발걸음으로 걷던 아카이는 활소리가 들리는 부근에서 멈췄다. 아직 늦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연습장으로 쓰는 공터에 가까이 가자 아침부터 몰려있는 아이들이 보였다.


    구호소리에 맞춰 팽팽히 활시위를 당긴 단발머리의 소녀는 망설임 없이 활을 놓는다. 방해하지 않기 위해 침묵하던 곳에 소녀의 미소를 기점으로 작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귀, 귀여워…….”
    “흑흑, 한 번만 사귀고 싶어….”
    “난 하루라도 좋아….”




    어쩌면 후루야의 경쟁상대들은 아카이가 아니라 이 소녀들은 아닐까. 좋아하지 않는데 사귀는 건 불가능 할 것 같다며 늘 거절하는 히로미츠지만, 몇 시간만이라도 좋다고 빌면 여자애들에게 무른 히로미츠는 사귈지도 모른다. 아카이는 작게 헛기침을 하고 소녀들을 위압적으로 내려다보았다.


    175에 가까운 키라 가만히 있어도 튀는데, 그린 듯한 미녀가 냉랭하게 내려다보는데 버틸 정도로 간이 큰 아이는 없었던 모양이다. 일부러 인기척을 숨기고 뒤에 있던 아카이가 존재감을 드러내자마자 병아리마냥 옹기종기 모여있던 소녀들이 화들짝 놀라며 흩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래서 아침마다 안 올 수가 없다. 이전까진 이름만 올리고 나오지도 않던 아카이가 2학년이 되고 히로미츠가 입부한 후로 갑자기 성실하게 부 활동에 나오게 된 이유다. 처음에는 아카이 때문에 오던 소녀들이 히로미츠로 갈아탄 것도 꽤 오랜 일이다.


    애초 시끄러운 걸 좋아하지 않는 아카이니 냉랭한 시선에 풀이 꺾인 아이들이 다정하게 대하는 히로미츠에게 넘어가는 것도 너무 당연한 일이라, 아카이는 별 생각이 없다. 그녀에게 걱정이란 후루야도 아니며, 그저 물러터진 히로미츠가 어느 날 연인이라며 듣도 보도 못한 사람을 데리고 나타나는 일 정도다.




    “선배?”
    “안녕, 아가.”
    “……그렇게 부르지 마요, 진짜.”




    아카이의 호칭에 철창을 사이에 두고 다가온 히로미츠가 작게 미간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모두 히로미츠의 미소를 좋아하지만, 사실 아카이는 이런 모습이 더 좋았다. 어느 상황에서도 상냥하게 웃는 사람이 자신에게만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상황이 더 특별하게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후루야에게조차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이는 히로미츠니까.


    아카이가 이런 히로미츠의 약점을 잡은 건 지난 현내 단합 합숙 때였다. 다소 강도 높은 훈련에 지친 아이들이 모두 잠든 시간에 잠귀가 밝은 아카이가 히로미츠의 휴대폰을 무심결에 대신 받았고, 나가노에 있다던 히로미츠의 언니가 부르는 호칭을 들어버렸기 때문이다.


    6살 차이라서, 어릴 때부터 늘 엄마처럼 챙겨줘서 그렇다며 변명하는 히로미츠에게 알겠다고 진정시킨 아카이는 그 후로 종종 아가라며 히로미츠를 불렀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다. 아카이에게도 14살 차이의 남동생이 있으니까. 그렇대도 아가라고 부를 만큼 살가운 사이도 아니긴 하지만.




    “제로 챙겨줘서 고마워요, 선배.”
    “응, 엄청나게 지겨워하더라.”
    “어릴 때부터 이래저래 시달려서 그래요. 워낙 귀여우니까.”




    후루야는 이렇듯 히로미츠가 뒤에서 챙기는 걸 모른다. 그리고 아카이는 알려줄 생각이 없다. 아침에 걸려온 전화에 조금 들떴다가, 후루야를 부탁하는 히로미츠에 기운이 빠졌다. 아카이가 절권도 시범을 보여주자 하는 말이 ‘선배한테 종종 제로를 부탁해도 될까요?’라니.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혹 가르쳐 달라고 하면 그 김에 몸으로도 좀 친해지고 싶어서 수작 부린 건데 자승자박이었다. 도대체 히로미츠에게 후루야는 어떤 이미지인 건지 모르겠다. 빈말로도 성격이 좋다고 말하긴 어려운 사람인데, 히로미츠만 후루야를 쥐면 숨 막힐까 불면 날아갈까 애지중지하며 아기새처럼 대한다.


    어쨌든 그 핑계라도 아침부터 히로미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았다. 약간 낮은 듯한 목소리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면이 있어서, 아무리 들어도 질리지 않는다. 말하기보다 듣기를 좋아하는 것이 유일한 흠이랄지, 아카이에게만 흠이긴 하지만.




    “선배.”




    헤어지는 길목에서 팔을 벌리는 히로미츠에게 부러 고개를 숙이며 안겼다. 이것도 아카이의 보람 중 하나다. 이른 아침에 후루야를 부탁하는 것에 무얼 드리면 좋을지 고민이라는 히로미츠에게 안아달라고 말했다. 정말 그걸로 되겠냐는 히로미츠에게 ‘그럼 키스해줘’라고 말하면 무른 히로미츠라도 도망갈 것 같아서 찾아낸 타협점이다.


    교복 위에 늘 후드 집업을 걸치는 히로미츠라 아무도 모르겠지만, 안았을 때 생각보다 존재감이 확실하달지. 딱히 크기에 집착하는 편은 아니지만, 가는 허리를 도망가지 못하게 끌어안고 이 위에 얼굴을 묻으면 움찔하는 몸이 귀엽기도 했다. 아무리 둔해도 몸까지 둔한 건 아닌 모양이지. 곤란해하면서도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에 노곤하게 녹아내린다.




    “그만, 지각하겠어요.”
    “지각하면 안 될까?”
    “으음…. 안 될 것 같아요.”




    일부러 떨어지지 않은 채 고개만 들어 올려 물으면 발긋해진 뺨과 귀로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는 게 보인다. 어쩌지. 이 정도로 곤란해하면 나중엔 어떡해야 하나. 아직 사귀지도 않는 사이지만 훗날을 걱정하는 아카이를 힘을 주어 뗀다.


    방과 후에 보자며 멀어지는 히로미츠를 보며 아카이는 이제 때가 무르익었음을 느꼈다. 오히려 이번이 기회다. 아카이를 견제하느라 주위를 못 보는 후루야에겐 미안하지만, 이번 발렌타인에 승부를 봐야겠다. 고백하면 흔들릴 타입이기도 했다. 그리고 안았을 때 오는 반응도 그렇고, 여러모로 적기다.


    미안하지만 후루야군, 히로미츠의 아내 자리는 내가 받아가도록 할게.







    * * *







    2월 14일. 세상에서 제일 멍청하고 바보 같은, 심지어 일본 전통 명절도 아닌데 모두가 휘둘리는 제일 끔 찍 한 날.


    아침부터 인근 학교 여학생들에게 받은 초콜릿 때문에 지각할 뻔한 히로미츠의 손목을 억지로 잡아끌고 겨우 등교에 성공한 후루야의 기분은 땅바닥을 뚫고 내핵까지 쳐들어갈 기세다. 애초 궁도부로 유명한 히로미츠가 도대체 왜, 왜, 왜 인근 학교 여학생들에게까지 인기 있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무슨 이유인지 히로미츠는 디저트류를 잘 만드는 걸로 유명했다. 그게 소학교를 졸업한 애들 사이에서 퍼지고, 중학교를 졸업한 애들 사이에서 퍼지고, 이제는 고등학교까지 퍼졌으니. 모르긴 몰라도 다단계 사업을 해도 잘 할 거다. 답례로 그 빌어먹을 디저트만 주면 될 테니까!


    저건 의리초코다, 우정초코다. 하하, 그럴 리가 없지. 누가 의리초코라면서 굳이 구하기도 힘든 청회색의 리본을 포장지에 묶어서 선물할까? 포장지를 백엔샵에서 구한 것도 부담 느낄까 봐 그런 게 훤히 보인다. 후루야에겐 여자애들의 수작이 다 보이는데, 히로미츠만 화이트데이 때 보자며 해맑게 웃어준다.


    너만 몰라. 너만 모른다구. 저 발긋해진 뺨과 사랑에 빠진 눈동자가 너만 보는 걸 너만 모르지.


    그러는 후루야도 가방 속에 푸른 포장지와 청회색의 공단 리본으로 마무리한 초콜릿이 있다. 올해는 꼭 고백해야지, 2주 전부터 지긋지긋하게 연습한 초콜릿을 억지로 남동생에게 먹여가며 완성한 세상에서 제일 완벽한 초콜릿이다. 이제 초콜릿 냄새만 맡아도 토하겠어, 라는 남동생에게 어제 남은 실패작을 억지로 먹였다.


    매년 고백을 연습하는 후루야를 보며 남동생은 “차라리 나랑 히로 누나가 결혼하면 어때? 합법적 가족.”이라며 농담했지만 재작년 죽지 않을 만큼 맞은 후로 그런 모험을 하는 것을 관뒀다. 맞으면서도 사기꾼, 거짓말쟁이, 히로 누나가 이런 모습을 알아야된다며 지껄이길래 복싱으로 결투를 청하자 진심으로 죽일 생각이냐며 도망쳤었다.


    교실에 들어서니 더더욱 가관이었다. 히로미츠는 내내 후루야에게 스토커니 변태가 붙는다며 걱정하지만, 후루야는 안다. 진짜 위험한 건 히로미츠에게 붙는 족속들이다. 둔해터진 히로미츠는 자신을 보고 침 흘리는 사람에게도 “어디 불편하세요? 병원에 같이 가드릴까요?”라고 말하니까.


    순수하게 좋아하는 애들이 히로미츠가 가는 곳마다 나타나서 초콜릿을 줄 리가 없다. 하필 여자애들이라 히로미츠의 경계가 낮은 건 더 문제다. 후루야는 책상 한가득 쌓인 초콜릿을 보며 책상까지 불태워버리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이거 다, 의리니까. 응? 레-쨩.”




    침묵하는 후루야의 눈치를 보던 히로미츠가 아주 어릴 때 부르던 호칭을 꺼낸다. 나이가 들고는 어린애처럼 부르지 말라며 투덜거린 후루야의 말에 제로라 칭한 지 꽤 됐다. 싫어하는 줄 알았던 호칭이 사실은 약점인 걸 알자마자 귀신같이 기분 나쁠 때 써먹는다.


    고개를 기울이며 후루야의 눈치를 보는 고양이 같은 히로미츠가 혀 짧은 소리를 내며 부르기에 약해지는 것도 모르면서, 우리 사이의 특별함을 모두 담은 호칭이라 좋아하는 것도 모르면서. 넌 진짜 아무 것도 모르면서.




    “……너말야, 내가 그 호칭에 약한 거 알고,”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화가 풀린 후루야를 보는 히로미츠의 표정에 또 들뜨고 만다. 이 특별함을 누리는 게 자신뿐이란 게 결국 화를 낼 수 없게 만든다.





    “자리에 앉아라, 이 녀석들아! 거기, 후루야랑 모로후시! 아침부터 연애질 그만하고 자리에 가도록!”
    “선생님….”




    끼어드는 목소리에 다시금 서늘해진 눈으로 돌아보는 후루야에 타이밍 좋게 교실에 들어온 선생이 주춤했다.




    “큼, 몇 페이지였지? 반장.”




    말을 돌리는 선생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자리에 가 앉았다. 대각선 뒤 자리인지라 허둥거리며 초콜릿을 정리하는 히로미츠를 구경했다. 초콜릿 가게라도 차릴 생각이냐며 농담하는 선생에게도 하나 쥐여주는 히로미츠다. 정말 의리로, 우정으로 준 초콜릿이라 여기니 저렇게 넘기는 것이다.


    진심으로 주면 받아주지도 않을 거면서, 우정으로 포장한 진심은 저렇게 쉽게 다른 사람에게 줘 버린다. 받은 선생조차도 리본 색을 보고 의아해하며 다시 히로미츠에게 돌려준다.


    모두에게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을 좋아하는 건 생각보다 힘든 일이다. 그런 사람일수록 진심으로 거절당할 것이 무서워서 숨길 수 밖에 없다. 다정해서 좋아하게 됐는데, 다정하게 나를 밀어낼 것이 두려워지니까.


    후루야는 종이가방 속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어설프게 걸쳐진 백엔샵 포장지에 묶인 청회색 공단리본이 자신처럼 느껴져 우울해졌다.


    결국 아마 오늘도, 가방 속에 담긴 초콜릿은 건네줄 수 없을 것만 같아. 네가 날 보면서 곤란해할까 무서워서. 사랑은 언제나 후루야를 겁쟁이로 만든다. 아직은, 괜찮다. 연인이 없는 히로미츠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후루야니까, 아직은.









    그 생각이 오후에 이렇듯 깨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후루야는 아카이의 멱살을 잡고 벽에 밀어붙였다. 목을 조를 듯이 미는 후루야에게 당황한 히로미츠가 뒤에서 껴안으며 말렸다. 방과 후 갑자기 체육관 뒤로 히로미츠를 불러내는 아카이에 기다리는 척하며 따라갔다.




    “좋아해, 히로미츠.”
    “선배?”
    “진심이야. 진지하게 생각해 줘. 나랑 사귀는 거.”
    “……무…슨…. 왜 그래요, 갑자기.”




    거절할 거라 생각했다. 언젠가는 아카이가 고백할 걸 알았다. 그래봤자 상관 없을 거라 여겼다. 좋아하지 않는데 사귈 수는 없어요, 멘트까지 안다. 그만큼 오래 곁에 있었다. 히로미츠가 무슨 말로 아카이를 거절할지 후루야에겐 훤히 읽혔다.


    앞으로는 아카이를 불편해할 히로미츠도 뻔했다. 고백 후 불편해하는 히로미츠를 견디지 못하고 멀어지는 애들만 줄 세워도 운동장 한 바퀴는 채울 수 있다. 그래서 암묵적으로 히로미츠에게 우정으로 포장하며 맴도는 애들이 수두룩했다. 그러면서도 손에 쥔 가방끈을 저도 모르게 쥐어뜯고 있었다.


    학년 초에 아카이가 궁도부에서 활을 쏘는 모습을 넋을 잃고 본 히로미츠를 아니까. 테니스부가 아닌 궁도부를 택한 이유가 아카이였던 것이 늘 후루야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그때까지 서로 밖에 없던 세계에 끼어든 불청객에 대한 본능적인 경계였다.




    “선배,”
    “네가 좋아하는 애가 누군지 알아.”
    “…….”




    뭐?


    그때까지 불안으로 날뛰던 심장을 누군가 쥐어 터뜨린 것만 같았다. 히로미츠에게 좋아하는 아이라니, 들어본 적 없다. 애초에 그렇게 가까웠는데 히로미츠의 눈이 향하는 곳을 후루야가 모르는 게 가능할 리도 없었다.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것만 같았다. 가벼운 현기증을 느끼며 억지로 짧게 끊어지는 호흡을 억눌렀다.




    “나랑 사귀어. 히로미츠.”
    “…협박이에요?”
    “시험해. 날 이용해. 너도 헷갈리잖아. 진짜 …을 좋아하는 건지, 아닌지.”




    싫다고 해. 안 하겠다고 말해. 히로, 제발!




    “…선배한테 이게 무슨 이득이 돼요?”
    “말했잖아. 널 좋아한다고.”
    “……당신 진짜, 이상한 거 알아?”
    “알아, 너한테만 이러거든.”




    그 말을 끝으로 히로미츠를 벽에 가두고 코 끝을 부딪히며 가볍게 입을 맞추는 아카이에 입을 벌려 응하는 히로미츠를 보았다. 본 게 맞는지 모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후루야는 아카이를 벽에 밀어붙였고 히로미츠는 그런 후루야를 말리고 있었다.


    팔을 막자 다리로 걷어차며 화내는 후루야에게 몇 대 얻어맞은 아카이는 터진 입안의 피를 뱉어내며 머리를 쓸어올렸다. 아침부터 고백하겠다고 나름 신경 써서 정돈한 머리카락인데, 섬세함이라곤 쥐꼬리만큼도 없는 후루야 덕에 사귄 첫날부터 이 꼴이다.




    “억울하면 네가 먼저 알아내지 그랬니? 히로미츠가 좋아하는 사람 말야.”
    “닥쳐!”
    “제로, 진정해! 가요, 선배! 어서!!”




    아카이를 보며 고개를 젓는 히로미츠에 속이 뒤틀렸다. 늘 이랬다. 알고 있었다. 연인이란 자리를 차지해봤자 후루야보다 우선순위가 될 수는 없다. 자기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아카이를 견제하는 후루야를 볼 때마다 질투에 속이 끓어올랐다.


    뒤에서 얼마나 후루야를 애틋하게 생각하고 아끼는지 알려주기 싫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헷갈린다면 그 정도의 감정이다. 빈틈을 차지해서 파고들면, 그게 뭐 어때서? 원래 사랑이란 진흙탕이고 더럽고 지저분하다. 그것도 모르면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히로미츠에게 사랑받는 후루야를 보면 있는지도 몰랐던 감정이 아카이를 괴롭혔다.




    “싫어. 히로미츠. 네 여자친구는 나잖아, 이제. 날 우선해 줘.”
    “지금 그런 말 할 때에요? 제로, 진정해…?”




    어느샌가 움직임을 멈춘 후루야에 히로미츠가 의아해하며 고개를 내렸다. 뒤에서 가두듯이 끌어안은 탓에 고개를 숙인 후루야의 표정을 알아보기 힘들었다. 아카이는 ‘여자친구’란 말을 듣자마자 발길질을 멈춘 걸 알았다. 히로미츠의 품속에서 떠는 몸이 가증스러웠다.




    “내가….”
    “응, 응. 제로. 뭐든 말해. 응?”




    어느샌가 몸을 돌려 자신의 품에 파고드는 가녀린 소녀를 안아 달랜다.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등을 토닥이는 손길을 당장이라도 붙들고 싶었다. 그게 힌트가 되어 아카이를 떠나게 될까 조마조마했다.


    히로미츠가 자신에게 흔들리는 건 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아카이는 후루야와 히로미츠 사이의 깊고 굳건한 유대가 두려웠다. 육체적으로 자신에게 끌려도 늘 후루야를 정신적으로 우위에 두는 히로미츠를 온전히 가질 수 없음이 아카이의 속을 태웠다.




    “…내가… 먼저 좋아했는데…. 히로…. 진짜 좋아해….”




    울음을 터뜨리며 매달리는 후루야의 뺨을 닦아주는 히로미츠를 보며 패배를 직감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안아주는 거 말고 미친 척하고 가슴 만지게 해달라고 할 걸 그랬다. 사귀자마자 차이다니, 웃음도 안 난다. 구두 끝으로 땅만 긁었다. 울어서 매달리는 건 후루야처럼 귀여운 얼굴이나 먹히겠지. 코끝이 찡해져서 입술만 깨물었다.




    “미안해, 제로.”
    “?!”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고개를 들어 히로미츠를 보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후루야와 곤란한 듯 아카이를 보며 웃는 히로미츠가 보였다. 설마…




    “좋아해, 제로.”
    “…뭐….”
    “하지만 선배… 아니, 언니 말대로 그게 우정인지 사랑인지 아직 잘 모르겠어. 그래서 나,”




    어느새 고요해진 공간에 후루야와 아카이는 히로미츠의 입만 봤다. 후루야는 도대체 히로미츠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어서, 아카이는 혹시 모를 희망에 이어질 말만 기다렸다.




    “두 사람하고 동시에 사귀어보고 싶은데, 가능할까?”
    “…….”
    “……난 찬성.”




    기회다. 뭐가 됐든 상관 없었다. 일단 사귀면 될 일이다. 대답을 먼저 하는 사람부터 사귀는 것도 아니건만 아카이는 혹시 히로미츠의 마음이 바뀔까 다급하게 대답했다. 울먹거리며 히로미츠를 올려다보던 후루야가 상황을 파악했는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 나도 찬성. 대찬성. 그럼 나랑도 키스해. 아까 아카이랑 키스했잖아, 히로. 나랑도 해. 빨리. 빨리!”




    입술을 들이밀며 히로미츠의 얼굴을 붙드는 후루야에 정신을 차린 아카이가 후루야를 히로미츠에게서 떼려고 했지만 뭘 먹고 이렇게 힘이 센지 떨어지질 않는다. 고릴라 그 자체다. 이런 여자애가 뭐가 귀엽다고 그 난리인 건지!





    “아까 전엔 나랑만 사귀는 중이었잖아! 지금부터 카운트 해!!”
    “와 이 여자 봐라? 히로, 히로 빨리 해 줘. 나도 혀! 혀 넣어서 할래!”
    “뭐라는 거야, 너 때문에 제대로 하지도 못 했는데! 내 머리채 잡아 뜯어서 혀는 넣지도 못 했어!!”
    “야, 그럼 내가 본 건 손가락이었냐? 그리고 가슴 만지는 것도 봤거든? 나도 만질래, 만지게 해줘! 히로!!”




    어느샌가 히로미츠의 허리를 껴안고 놔주지 않는 후루야를 억지로 떼어내려는 아카이 때문에 작은(…) 소란이 생긴다. 혀와 가슴을 외치는 둘을 보며 질린 히로미츠가 결국 둘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밀어냈다.




    “둘 다 그만!!!!”




    정지 자세로 밀려난 채 멈춘 두 사람을 본 히로미츠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후루야에게 잡힌 탓에 엉망으로 헝클어진 긴 생머리의 아카이와 울음으로 얼룩진 얼굴로 히로미츠에게 매달리다 아카이에게 밀리지 않으려 애쓴 탓에 단정하던 교복이 엉망이 된 줄도 모르는 후루야까지. 누가 이 학교의 명물인 귀엽지만 가시가 있는 장미 같은 후루야 레이와 얼음공주 같은 아카이 슈이치라고 생각할까?


    어쩌다 양손의 꽃인지 모르겠지만, 히로미츠는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둘 다 동의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사랑 받는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둘 모두에게 이끌리는 것도 사실이니까.




    “당분간 잘 부탁할게?”




    이러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알아서 떠나겠지. 몇 년 후에야 틀렸음을 깨달을 생각을 하며 히로미츠는 속 편하게 둘을 동시에 안고 토닥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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