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저녁, 히로미츠는 자신의 집이 아닌 곳으로 퇴근한다. 퇴근길에 장을 볼 땐 꼭 셀러리를 추가한다. 늦게 오지 않으면 좋겠는데, 생각하며 한쪽으로 어떤 반찬이면 좋을지 생각하며 장을 봤다. 주말이라 해봐야 토요일 저녁부터 일요일, 그마저도 가끔은 반납해야한다.
신년이 되어 숨 가쁘게 달리던 공안도 조금은 숨통이 트였지만, 그도 오래가진 못한다. 히로미츠는 조금 기운이 날 만한 식단을 생각했다. 머릿 속과 달리 집어 드는 재료에는 망설임이 없다. 레이가 도착할 때 따뜻하게 먹이고 싶어서, 조금 서둘러 계산을 마쳤다. 아파트 문을 열자 하로가 반가운 듯 달려 나왔다.
자연스레 품에 안아 들어가니 주인의 성격대로 한 치의 흐트러짐 없는 집안이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도 손님이 오는데 집이 더러운 건 안 된다며 히로미츠가 오는 날이면 전날 미리 청소하는 탓이다. 평소에도 흔적을 남기지 않는 사람이기도 했다.
"나 왔어." "응~. 씻고 와. 밥 다 됐어."
타이밍 맞게 돌아온 레이가 굳이 히로미츠의 얼굴을 한 번 확인하고 세면대로 간다. 매 주말마다 같은 패턴인데도, 레이는 꼭 히로미츠와 눈을 마주친 후 손을 씻으러 갔다. 마주 앉은 식탁에서 둘은 많은 이야기를 나누진 않았다. 애초 대화하기 위해 히로미츠가 오는 게 아니니까, 당연한 일이다.
히로미츠가 토요일 저녁에만 레이의 집에 들러 저녁을 하고 같이 식사 후 잠자리에 드는 것도 꽤 오랜 일이다. 본디 각자의 집이 있고, 서로가 오랜 친우이긴 하지만 특별한 감정이 있는 사이는 아니다.
최소한 레이에게, 히로미츠는 자신과 같은 감정은 아닐 거라 생각해 왔다. 늘 조용한 토요일의 저녁. 살가운 말 한마디 없이, 레이는 식기가 부딪히는 소리도 없이 고요히 히로미츠가 차린 식사를 먹는다. 히로미츠만 가끔 그런 레이를 쳐다보지만, 이내 눈으로 묻는 시선에 젓가락 끝만 입에 물고 어색한 웃음으로 고개를 저었다.
이제 30대 중반, 각자에게 가정이 생겨도 어색하지 않을 나이다. 오히려 레이는 상사에게 여러 번 권유를 받았다. 선을 보러 나가는 레이에게 그래선 안 된다 되뇌면서도, 히로미츠는 가끔 그를 추궁하고 싶었다.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뻔히 알면서도 불 속에 손가락을 넣어보는 아이처럼 굴고 싶었다.
입맛이 떨어져 깨작거리는 히로미츠를 두고 레이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도 없이 욕실로 들어가 목욕을 시작하는 레이가 떠난 식탁에서, 히로미츠는 삼킬 수 없는 질문이 입술 끝을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참았다.
우리, 도대체 무슨 관계냐고.
그 새벽을 기억한다. 신입 티를 채 벗지 못한 자신이 잠입한 조직에서 NOC임을 들켰던 그 새벽. 스마트폰에 남은 정보를 파괴하기 위해 라이의 리볼버를 빼앗아 심장에 겨눠야만 했던 그 새벽을. 히로미츠는 그게 최선이라 생각했다.
전날 아침, 저를 붙들고 다짐처럼 살아서 돌아가자며 말하는 레이에게 한 약속조차 지킬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한가지 생각만 했다. 레이만은, 레이만큼은 들켜선 안 돼. 그 애 만큼은, 절대로 지킬 거야. 절대로 살아서, 이 끔찍하고 고독한 곳이 아닌 빛 아래로 가도록. 비록 그 세계에 '내가' 없더라도, 너만큼은.
그게 네가 구해준 내 목숨의 가치니까. 어차피, 죽은 목숨과 같았다. 레이가 다가와 자신을 구원하기 전까지 히로미츠는 죽은 것과 다름 없는 삶이었다. 그런 저에게 삶의 이유를 부여한 사람을, 사랑할 수 밖에 없었다.
선택권이 없었다. 그 애를, 태양 아래에서 반짝거리며 빛나는 자신의 머리칼보다 더 환하게 웃어주었던 레이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감히 생각해본 적도 없을 정도로, 그렇게 히로미츠는 레이를 사랑해왔다.
마지막 욕심이었다. 그 문자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어린 시절, 서로가 유일한 것처럼 웃어주던 때부터 사랑한 사람에게 보내는 마지막 속죄였다. 어쩌면, 사람에게 영혼이란 게 정말 있다면, 레이가 오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혼이란, 심장이 멈추고 아주 짧은 순간은 세상에 머무른다고 해서, 네가 오는 걸 보고 싶었는지도 몰라.
어리석어서, 그렇게 영혼으로라도 네가 내게 마지막에 오는 길이라도 보고 싶어서, 해선 안 될 행동을 해버리고 말았는지도 모른다.
아카이의 제안에 마음이 흔들렸다. 굳게 결심했던 것들이 부서졌다. 살아서 널 다시 보고 싶은 욕심이, 너와 함께 빛 아래로 가고 싶어져서, 죽기 싫어져서.
설득 후 옥상을 떠나 계단 아래를 내려본 순간, 계단이 꺾이는 자리에 레이가 히로미츠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그게 네 선택이구나, 히로."
이해하기 힘들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던 것처럼 구는 레이가. 설명을 요구하는 라이를 지나쳐 준비한 것처럼 기절한 남자를 끌고 간 레이는 버본의 총으로 옥상에서 신원도 알 수 없는 사람의 심장을 꿰뚫었다. 경악하는 둘에게 "어차피 오늘 사형일이었어."라고 말한 레이는 남자의 피를 뒤집어쓴 채 폭탄까지 설치한 후 더 이상의 말도 없이 히로미츠의 손목을 이끌었다.
준비한 차에 아카이와 히로미츠를 태운 버본은 뒤처리가 남았다며 둘을 먼저 보냈다. 증인보호프로그램으로 일본에서 자신을 지우고 미국으로 가게 될 때까지, 레이는 단 한 번도 히로미츠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상처 주려던 게 아니라고 변명할 기회도, 용서해달라고 빌고 애원할 기회도 레이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저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버티기를 바라듯, 히로미츠를 홀로 내버려 두었다.
가끔 발신제한으로 전화를 걸어 버본의 소식을 전하는 아카이의 장난스러운 투덜거림에, 아픈 곳은 없어 다행이란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새벽 이후 4년이란 시간동안 단 한 번도 히로미츠는 레이의 그림자 끝조차 볼 수 없었다.
그게, 레이가 히로미츠에게 내리는 벌이었음을 이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겨우 깨달았다. 믿기 싫었다. 후루야 레이가 모로후시 히로미츠를 미워할 수도 있음을 차마 인정할 수 없었다. 미국으로 떠나는 비행기 안에서 어쩌면 앞으로 다시 만나주지 않을지도 몰라, 이기적이게도 그런 생각이 든 후에야 자신이 얼마나 큰 상처를 레이에게 안겼는지 깨달았다.
그 날의 그 애가, 자조하듯 읊조렸던 그 모든 말들이, 히로미츠를 쳐다보지도 않고 보내던 죽어버린 그 눈동자가 감은 눈 속에서 더 선명해졌다.
미안해, 레이. 그러려던 게 아니야. 널 상처입히려고 죽으려고 한 게 아니야. 그게 아니야. 널 지키고 싶었어. 못난 내가 임무에 실패한 책임으로 너까지 세상에서 지우게 될까 봐 무서워서.
그 자리에 없는 레이에게 미안해서 차마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울었다. 눈물조차 자신을 용서하길 바라서 흘리는 거짓된 참회같아 떳떳하지 않았다. 그때서야 히로미츠는 자신이 어떤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가장 원하지 않던 것을, 가장 괴로운 방법으로.
모든 것이 정리된 후 돌아온 일본에서도 레이를 만나기는 힘들었다. 청사 근처 낡은 아파트에 자리 잡은 후 가끔 들리는 차소리에 깨어 불 켜지 않은 커튼 밖으로 내려다보이는 주차장에서, 히로미츠는 가끔 레이의 차를 보았다. 처음에는 나가서 잡으려고 했지만 그때마다 차를 몰고 사라지는 레이에게, 히로미츠는 아직 벌이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출발선부터 달랐다. 같은 청사에 근무해도 임무를 실패해 미국의 일본 공안 지사 업무를 수행한 자신과 일본을 흔든 조직을 궤멸한 공을 세운 레이 사이의 계급차는 더더욱 멀어졌다. 이대로 멀어지는 걸까, 체념할 즈음이었다.
몇 년 전 겨울,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얼떨떨한 마음으로 열었다. 집 앞에 머무르다 평소처럼 돌아갈 것 같던 레이는, 문 너머에서 히로미츠를 기다렸다. 열린 문을 사이에 두고도 한참을 바닥만 보던 레이는 그 새벽 옥상에서 장소만 옮겨온 듯 죽은 눈으로 바닥만 봤다.
침묵으로 대치 아닌 대치를 하던 둘 사이를 무너뜨린 것은 히로미츠였다. 레이가 자신을 용서할 준비가 된 것은 아닐까, 지금 생각하면 속 편한 기대를 하며 얼어버린 손을 잡았다. 집에 들어오길 바로 잡아 끄는 손길에도 힘을 주어 버티던 레이는 되려 히로미츠를 밖으로 잡아 당겨 품에 안았다.
“이제, 다 끝났어. 히로. 더 이상, 무엇도 널 앗아갈 수 없어. 그게 설령, …이라 해도.”
누구에게서? 그런 물음을 던질 새도 없었다. 센서등 마저 꺼져 짙은 어둠이 내린 복도에서 레이는 보호하듯이 히로미츠의 머리부터 온 몸을 껴안았다. 숨 막힐 듯 죄어오는 품속에서 히로미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레이가 다시 자신에게 돌아온 것이 기뻐서, 몇 년이 지나도록 보지 못했던 첫사랑이 저를 용서할 준비가 된 것 같아서, 그게 좋아서.
오랜만에 맡는 한낮의 따뜻한 햇볕에 말린 이불 같은 내음이 그리웠다. 레이에게서만 나는 그 향은 아주 어릴 때부터 기억 속에 각인된 증표같았다. 히로미츠는 언뜻 겨울바람 곁에 실려 오는 그 향을 맡을 때면 어린 시절 함께했던 모든 추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시리게 느껴져도, 그 속에 다정함이 깃들어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것을 깨달은 것은 그 밤 이후 토요일 저녁마다 레이가 자신을 부르던 때부터였다.
평일의 레이는 히로미츠를 유령처럼 대했다. 문자도, 전화도 받지 않는다. 우연히 복도에서 마주쳐도 인사조차 받아주지 않는다. 둘의 사이를 모르는 동료들만이 후루야의 성격을 험담하며 히로미츠를 위로했다. 그때마다 히로미츠는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었다. 레이는 히로미츠를 불편해했다. 그것만은 선명하게 느꼈다.
그런데도, 레이는 토요일 저녁마다 히로미츠가 자신의 집에 있길 원했다. 일주일의 끝에 히로미츠가 자신의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처럼 굴었다. 그러던 것이 일 년, 이년이 지나고 현재에 이르러 히로미츠는 반사적으로 연락없이 레이의 집에 발걸음을 하게 됐다.
트라우마, 정확히는 PTSD. 주중에 보이는 레이의 행동은 분명 한 단어로 정의될 수 있었다. 하지만 주말의 레이는 히로미츠를 영역 안의 소유물처럼 대했다. 히로미츠는 레이의 공간 속에서 오랜 친우도 아니었고, 연인도 아니었으며, 완전한 타인도 아니었다. 그건 마치… 관상하는 식물같았다. 적어도 히로미츠에겐 그렇게 느껴졌다.
목욕을 마치고 침실 문을 열면 레이는 침대 헤드에 기대 문고본 책을 읽고 있었다. 언제부턴가 가끔 끼기 시작한 안경이 코끝에 걸려있었다. 스탠드 빛만으로는 책을 읽기에 부족할 텐데, 히로미츠는 방해하는 기분이 들어 문만 연 채로 바깥에 서 있었다. 이 풍경에 히로미츠는 때로 자신이 어울리지 않는 불청객 같았다.
“…….”
얼마간 멍하니 서 있었을까. 책을 덮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드니 레이가 안경을 벗어 스탠드 옆에 책과 올려두는 것이 보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히로미츠는 천천히 발을 문 안으로 들였다. 이 순간이 가장, 무서웠다. 일주일 만에 보는 레이가 침대 위에 앉아 자신을 눈으로 부르는 대도 거부할 수 없었다.
느릿하게 걸어도 채 열걸음이 되지 않아서, 히로미츠는 레이의 허벅지 부근에서 멈칫했다. 그때까지 얼굴 부근에 닿는 시선에 입안이 말랐다. 5일을 마주하지 못했던 시선은 지난 시간을 잊은 것처럼 과녁을 꿰뚫는 사수처럼 노려온다. 약간 떨리는 숨을 뱉고 겨우 레이의 손 근처에 다다라 침대에 앉으면 허리에 스르륵 감겨오는 손에 숨 쉬는 법을 잊을 것만 같았다.
“…히로.” “응.”
대답하면 등 뒤에 닿는 귀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일주일 만에 듣는 레이가 불러주는, 너무나도 그리운 어린 시절의 별명.
이 모든 시간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아픈데, 더는 계속하고 싶지 않은데도, 레이가 자신을 어릴 때처럼 불러주는 것이 기뻐서 결국 히로미츠는 태양을 맴도는 별처럼 다시 이 곳에 오고 만다. 언제나처럼 토요일의 퇴근 끝에 레이의 집에 들러 고요한 저녁을 먹고, 목욕 후 레이가 바라는 대로 등을 내주고, 다시 일주일을 반복하는 지옥 같은 포상을 얻는다.
이 끝에 우리는 언젠가 서로를 태우고 말지도 모른다. 하지만 히로미츠는 그것이 자신만이길 바랐다. 끝에 끝으로 다다라도 레이만은, 너만은. 이런 어리석은 사랑은 하지 말아.
또다시 돌아온 토요일. 늘 정적이던 공안이 오늘은 어쩐 일인지, 조금 소란스러운 기운이 돈다. 히로미츠는 퇴근 준비를 하면서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이번 주는 내내 레이를 만나지 못했다. 이전까지는 복도에서든 휴게실에서든 우연히 스쳐지나기라도 했었는데, 어쩐 일인지 그 금발도 회색 정장의 옷 끝자락도 보지 못했다.
조금 서운한 기분이 들어 문자라도 보내고 싶었지만 대답하지 않을 걸 알아, 겨우 참을 수 있었다. 직장의 특성상 어떤 소지품에도 개인사와 관련한 물품은 지닐 수 없다. 히로미츠는 이미 잠입수사 때 그로 인해 레이를 위기에 빠뜨릴 뻔했다. 그 사진은 미국에서 보내는 시간을 이겨내게 한 원동력이었지만, 동시에 뼈 아픈 실수를 저지르게 한 원인이기도 했다.
공안에 복귀한 후로 처분한 휴대폰 속의 그 사진이 생각난 이유는 왜일까. 히로미츠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대도 너무 갑작스러운 거 아니야?” “뭐, 어쩔 수 없지. 지금까지 일해온 게 대단한 수준이라던데. 역시 독종이야.”
지나가며 들려오는 말을 흘려들었다. 지난주엔 조금 바쁘게 준비하느라 못 했는데, 오늘은 전골을 해주고 싶었다. 마주 앉아 따뜻한 국물을 떠주고 싶었다. 레이의 체온이 높은 편인데도, 히로미츠는 가끔 그가 시리게 보여서 무엇으로든 그 온도를 데워주고 싶었다.
“아무리 그래도 실명이라니. 그 대단한 경시정님도 어쩔 수 없는 거네.” “그 얼굴이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어디 수발할 아가씨라도 구해서 잘 살겠지, 뭐.”
경시정? 히로미츠는 마주 오는 남자들의 입에서 나온 익숙한 지위에 걸음을 멈췄다. 남자들은 이 거리에서 들릴 거라 생각지 않는 눈치다.
“아서라. 이전에야 경시총감 후보로 거론됐으니 그 선 자리가 들어온 거지. 집안에서도 내버린 사생아따위 알 게 뭐야.” “무슨 말이에요.” “모로후시군?”
남자들은 히로미츠의 넋이 나간 표정에 의아한 기색이었다. 선배고, 상사인데. 인사해야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히로미츠는 저도 모르게 남자들 중 한명의 팔을 붙들고 물었다. 목소리가 형편없이 제멋대로 튀어 나갔다. 윽박지르고 싶은 것을 겨우 눈을 감고 억눌렀다.
“경시정님…한테,” “…몇 달 전부터 돈 소문인데 몰랐어? 후루야 경시정, 퇴사하시는 거.”
몇 달 전부터.
히로미츠가 수없이 레이의 집을 드나들었던 주말이 몇번이었을까. 가슴 졸이며 레이의 곁에서 잠들었던 그 시간은 얼마나 될까.
그런데도, 너는. 어떻게 단 한 번을 나한테.
“지금 그 사람 어딨어요.” “글쎄… 그것까진 모르지. 자네 괜찮나?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고,”
다소 무례한 후배의 행동에도 걱정하는 기색을 내비치는 사람에게 인사할 겨를도 없이 히로미츠는 도망치듯 그 자리를 벗어났다. 이런 예정은 없다. 늘 그랬던 것처럼 레이의 집에 가기 전 장을 보고, 말은 없지만 묵묵하게 차려준 밥을 다 먹는 레이를 지켜보고, 닷새를 유령처럼 보내게 한 것을 보상이라도 받듯 어린 시절의 별명을 듣고 그의 곁에서 잠이 들고. 그 예정 외에 다른 예정은 모른다.
어느샌가 길거리를 뛰고 있었다. 하얗게 흩어지는 입김을 뒤로 하고 히로미츠는 레이의 아파트 문 앞에 섰다. 이유는 모른다. 하지만 여기 있을 것 같았다.
“제로! 제로!! 문 열어! 어서!!”
어지러웠다. 지금 당장 레이를 보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다. 공안에 입사한 뒤로 한 번도 맘 편히 큰 소리로 불러보지 못했던 이름이었다. 목소리가 떨려 제대로 부르기 힘들었다. 계속해서 레이의 이름을 부르는데 문득 이상했다. 하로가 있을 텐데, 히로미츠의 목소리에 반응도 하지 않는다.
왜? 스스로 물으면서도 문을 치는 주먹이 점점 약해졌다.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레이가 자신을 떠날지도 모른다고. 그 새벽 자신을 보내며 외면하던 때처럼, 일본에 돌아온 히로미츠를 두고도 보러 오지 않던 그 시간들처럼.
“문 열어… 열어, 제발… 열어줘…”
다리에 힘이 풀려 무릎을 꿇으면서 문을 두드렸다. 끝에는 애원하며 울음이 터졌다. 울음이 자꾸만 올라와 제대로 목소리를 내기 힘들었다. 언제나, 언제나 레이가 자신을 불렀다. 자신을 용서하지 않았을 레이를 부르고 매달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해하지 못하면서 레이가 부를 때만 어쩔 수 없는 척하며 끌려갔다.
결국 네가 필요한 건 나뿐이었는데. 너는 나 없이 너무 완벽한 사람인데.
“히로?”
멍한 정신으로 이제 환청을 듣는 걸까, 생각했다. 문 앞에 무릎 꿇고 앉은 자신을 돌려세우는 손에 멍하니 휘둘렸다. 물기로 가득 차 흐릿했던 앞을 깜빡이자 선명해지는 앞에 보이는 당황한 표정의 남자에 다시 서러움이 차올랐다.
“왜…” “감기 걸리잖아. 열쇠는 어쨌어?” “나한테 왜 말 안 했어.” “…….”
침묵하는 모습에 분노가 끓어올랐다. 변명이라도 하길 바랐다. 이미 히로미츠가 무엇때문에 다급하게 온 건지 아는 반응에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만 같았다. 차마 레이를 쳐다볼 수 없어 히로미츠는 시선을 비껴냈다. 도저히 원망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언제부터?” “…그게 중요해?”
네가 내게 이러면 안 돼, 레이. 너만큼은, 정말 너만은 내게 이러면 안 돼.
그제야 깨달았다. 레이의 트라우마는 끝나지 않았고, 이젠 히로미츠를 온전히 떠남으로 종결지으려 하는 것을. 토요일의 저녁은 그저 레이가 히로미츠에게 베푸는 마지막 자비였을 뿐이었다. 모든 게 잘못이었다. 그 새벽에 레이를 그 곳에 두고 떠나선 안 됐다. 차라리…
“제로. 죽는 게 나았을까?” “무슨…” “그렇구나. 내가 잘못 생각했어. 처음부터, 전부 잘못이야. 욕심내선 안 됐는데. 하, 하하.”
자조하며 웃는 히로미츠를 앞에 두고 레이는 말을 잇지 못했다.
“제로. 말해봐. 내가 죽었으면, 차라리…!”
웃으며 눈을 마주치는 히로미츠에 레이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제정신 아니야, 히로. 일어나. 일단 집에 가서…” “대답부터 해!!” “……죽길 원한 건 너, 아닌가?”
소리 지르는 히로미츠를 내려다보던 레이가 묻는 낮은 어조에 공기가 얼어붙는다. 이해할 수 없었다. 팽팽하게 당겨진 긴장을 깨트린 것은 레이였다. 그는 히로미츠의 멱살을 잡아 일으킨 후 문을 열어 현관에 던져넣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당황한 히로미츠가 벗어날 새도 없이 신발도 벗지 못한 채 레이의 손에 외투가 잡혀 침실로 끌려갔다. 끌려가는 것을 밀어내려다 구두가 복도에 벗겨져 엉망으로 흩어졌다.
“이거 놔. 제로. 놓으라고 했어.” “뭐가 문젠데.”
어느새 침대에 자신을 눕히고 올라탄 남자에 히로미츠는 의미를 알 수 없어 미간을 찌푸렸다. 레이 말대로다. 이 상태로 대화를 진행할 순 없다. 자신을 빼내고 미국 주재 일본 공안에 숨겨준 레이다. 히로미츠는 최근 몇년간의 레이의 행동에 자신이 지쳐있었음을 이제야 인정할 수 있었다.
만약 레이가 자신을 버림으로써 트라우마를 묻으려 한다면, 이유가 무엇이건 받아들이는 게 맞지 않을까. 그 새벽에서조차 옳은 판단을 하고 증명해낸 레이니까, 자신을 버리려한다면 합당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만… 그만할래. 이런 거, 더는 못 하겠어… 제로… 나 못 하겠어….”
하지만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생각했던 말이 아니다. 이게 아닌데, 안심할 만한 말을 해주려했다. 레이를 이해한다고, 자신을 버리고 떠나도 이해하겠다고 하려 했는데 참았던 눈물이 터지고 나니 원망도 같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 공간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히로미츠는 억지로 울음을 삼키며 위에 올라탄 남자를 밀어냈다. 레이는 그런 히로미츠의 손길을 내버려 두었지만 빠져나가도록 허락하지도 않았다.
“…히로.” “이건 아니야… 이렇게는 안 돼…. 그만하자, 그만할래.”
밀려나지 않는 레이에게 애원하다 더는 무감한 시선을 마주할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협탁 위로 보이는 금테의 안경에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억지로 턱을 잡아 돌리는 우악스런 손에 눈이 마주쳤다. 그늘진 눈가에 비치는 서늘함에 턱끝이 떨렸다. 젖은 얼굴로 자신을 보는 애처로운 표정에도 레이는 안타까움을 느낄 수 없었다.
“너는 단 한 번도 내게 묻지 않는구나.” “…….”
그 새벽 이후, 히로미츠는 레이에게 어느 것도 묻지 않았다. 이전처럼 말하지 않아도 너무나 서로가 익숙해 묻지 않았던 것과는 달랐다. 레이는 변했다.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알던 레이와 다르단 것을.
다만 인정하기 싫었다. 후루야 레이의 모든 것을 알고 이해하던 소꿉친구라는 자리를 잃는 것이 두려웠다. 물으면 답해줄 사람임을 안다. 하지만 그 질문으로 인해 레이가 자신을 이해자의 자리에서 배제할 것을 견딜 자신이 없었다.
“이해 못 했잖아, 히로. 말해줄까? 그 새벽에 내가 왜 거기 있었는지. 널 보낸 4년, 그리고 돌아오고도 내가 왜 널 만나러 가지 않았는지. 왜 경시청에서 널 유령 취급했는지. 넌 하나도 모르지.”
역시나, 일까. 언제나 그랬듯이, 레이는 히로미츠가 무너진 이유조차 정확히 안다. 그러나 달래거나 안아주진 않는다. 여기서 인정하면 어떻게 될까. 히로미츠는 석양이 비치는 방안에서도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내가, 내가 네 약속을 어긴 게… 미워서…?” “토요일 저녁마다 널 부른 건?” “내…가 불쌍…해서…?”
아니다. 전부 틀렸다. 입 밖으로 구체화한 말을 뱉을수록 자신이 틀렸음을 깨닫는다. 모두 히로미츠의 추측 뿐이다. 조금쯤은 화를 내도 누구도 꾸짖지 않을 텐데, 레이는 어린 시절 친척 아저씨에게 혼날 때처럼 흔들리는 눈동자로 밭은 숨을 뱉는 가여운 어린 소년을 보았다. 자신을 버릴까 두려워하며 창백하게 질려가는 흰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후루야 레이가, 그 빌어먹을 약속 하나 어긴 소꿉친구가 미운데도 불쌍해서, 토요일마다 부른다?” “…….” “너는 조금,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잡힌 턱으로도 시선을 비껴내던 히로미츠가 그제야 눈을 마주쳐온다.
“미안하지만, 널 놔 줄 생각은 없어. 나는 그 빌어먹을 FBI 놈처럼 어른스럽지 않아서. 나는 네가 죽으면 저승에 가서라도 널 되돌려 받을 거야. 그게 내 방식이니까.” “…….”
어느샌가 가까워진 얼굴이 코 끝이 맞닿았다. 이것마저, 레이가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한 거짓말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내일 헤어지면 있었는지조차 모르게 증발할지도 모를 사람임을 알았다. 맞닿는 입술에 순리에 따르는 순교자처럼 눈을 감았다.
입안을 파고드는 살덩이를 받아들이며 깨닫는다. 죽을 때까지, 어쩌면 죽어서도. 이 남자를 이해할 날은 돌아오지 않는다. 서로가 유일했던 세계의 어린 친구는 그 새벽에 이미 죽었다. 그리고 히로미츠는, 그 선택을 한 이 남자를 영원히 원망할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또, 이보다 더 한 고통을 히로미츠에게 안기더라도, 태양을 맴도는 별이 죽어 사라지지 않는 한 끝나지 않는 궤도를 돌 듯이 그렇게 레이의 곁에 머무를 것이다. 이 계절이 끝나 봄이 오고 또 다른 겨울이 온다 해도, 레이의 삶은 끝나지 않는 겨울을 살아갈 것이다.
그게 네 선택이라면 레이, 나는 네 곁에서 죽어서도 오지 않을 봄을 기다리며 살래. 전하지 않아도 알 레이의 목에 팔을 감으며 히로미츠는 처음으로 레이의 공간에서 온전한 존재가 되었다. 친우도, 연인도, 타인도 아니지만 그 무엇보다 가까이에 있을 어떤 존재가 되어서.
마침내 자신을 받아들이는 히로미츠를 보며 레이는 그제야 눈을 감았다.
30살의 겨울, 후루야 레이는 자살했다. 친우가 자살한 것과 같은 방법으로, 같은 장소에서. 모든 것을 끝낸 후 가장 사랑한 존재가 없는 세계에서 더 살고 싶지 않았다.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 떠난 곳을 사랑하며 사는 것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고통스러웠다.
죽을 때까지 자신을 가장 친한 친우로만 알았을 히로미츠에게 차마 전하지 못했던 마음으로 버텼다. 그러나 30살의 12월, 그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지킬 것이 없는 사람이 지키는 세계라니, 더없이 우습게 느껴졌다. 모든 것은 자신이 문제였는데. 후루야 레이만 없으면 세계의 모든 것이 완벽할 텐데.
별을 보며 권총을 당기는 손은 추위에도 정확히 심장을 뚫었다. 아, 의외로 심장이 터져도 사람의 의식이 몇초는 버티는군. 그따위 감상을 끝으로 30살의 자신을 죽인 후루야가 눈을 떴을 때, 우습게도 히로미츠가 죽기 며칠 전인 25살의 아침이 눈앞에 있었다.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자고 말할 때만 해도 그저 저승에 가기 전 후회했던 일을 가상으로 되돌려보는 것이라 여겼다. 저세상이란 생각보다 악질이네, 그 정도의 생각이 끝이었다. 그 새벽, 스카치의 정체를 알리며 NOC 사냥을 명하는 문자와 히로미츠의 마지막 문자를 받기 전까지.
다시금 아카이의 설득에 넘어가는 히로미츠의 목소리를 들으며, 레이는 이 세계조차 자신이 위협임을 깨달았다. 자신이 히로미츠의 곁에 있어선 안 된다. 언젠가 또 다시, 자신을 미워하는 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앗아갈까 두려워졌다.
그래서 의도적으로 모로후시 히로미츠의 곁에서 후루야 레이를 지웠다. 조직의 잔당까지 깨끗하게 제거하고 나서야 레이는 히로미츠를 만나러 갈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눈에 미약한 상처를 입었다. 몇 년에 걸쳐 나빠지는 시력에도 크게 감흥은 없었다. 그 몇 년 동안 주력한 것은 공안에서 히로미츠에게 중요한 임무를 맡기지 않도록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일이었다.
이제 완성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 후루야 레이는 더 이상 모로후시 히로미츠를 이 세계에서 지울 수 없다. 신도, 그 누구도, 혹은 레이 자신조차도.
자신을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온전히 미소 짓는 존재가 품 안에 있다. 이것으로 충분하다. 죽음을 건너서 원했던 별을 안으며 레이는 그 새벽 이후 처음으로 가슴 속을 채우는 충족감에 잠겨 들었다.
언젠가 히로미츠를 닮은 라일락이 길가에 피는 계절에 함께 거리를 걸을 수 있기를. 아주 작은 비밀을 품고 둘은 겨울의 무덤 속에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