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와로의 앞치마에 달린 호박인형이 우스꽝스러웠다. 가게에는 뭘 표현하고 싶은 건지 알 수도 없는 장식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가게 바깥의 안내판에 적힌 오늘의 추천메뉴는 스페셜 펌킨 파이, 추천 커피는 스페셜 펌킨 라떼. 호박이라는 훌륭한 단어가 있는데 왜 영어를 쓰는 건지. 거기다 스페셜이 왜, 몇번이나 반복해서 들어가는지 모를 일이다. 평범한 파이에 평범한 라떼였다. 호박맛이 첨가됐을 뿐이지.
오픈 파트인 아즈사는 이미 돌아갔고, 가게는 아무로 혼자 마감 시간만 기다리는 중이었다. 어찌나 정신없던지, 추천메뉴와 커피는 이미 매진이었다. 호박파이는 처음이라 약간 걱정했지만, 언제나 그랬듯 손재주 좋은 그는 종일 칭찬만 들었다. 물론 당연한 일이라 크게 감흥은 없었지만, 아무로는 특유의 미소를 날려대었다.
지긋지긋한 미국놈들, 여기까지 침투하다니... 속에서 어떤 인격이 불쑥 튀어나올 것 같았다. 어린이 탐정단 중 코난은 그런 그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불안한 눈동자와 올라간 건지 올라가려다만건지 모를 입꼬리로 미소를 띠고 있었으니.
그래도 어린 아이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니 어제부터 카페를 꾸민 보람이 있었다. 슬슬 다가오는 마감 시간에 테이블을 닦으며 할로윈 장식을 정리해 상자에 넣었다. 카페의 오픈 사인을 클로즈로 바꾸었다. 갑자기 후두둑 거리는 소리와 함께 포와로의 창문에 물방울이 부딪혔다.
비? 오늘 예보에 비가 온다는 소리는 없었으니... 소나기인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창고에 할로윈 장식을 넣은 상자를 들고 가려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갑자기 문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오늘 영업..."
아무로는 말을 멈추었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기타 케이스를 맨 남자였다. 아무로도 어디 가서 키로 작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는데, 이 남자는 그보다 커 보였다. 순간 가게가 작아지는 착시가 일어날 것 같았다. 아무로는 말을 잇지 못하고 상자만 잡은 채 앉아있었다. 남자는 고개를 한번 까딱하고는 바 테이블 끝자리에 걸터앉았다.
들고 일어나려던 상자를 내려놓고, 바에 다가갔다.
"저기... 손님, 죄송하지만"
"아... 정말 죄송해요. 혹시 비가 올 동안만 잠시 머물러도 괜찮을까요?"
남자는 손을 모으고 미안해하며 말했다. 그의 얼굴은 후드를 푹 눌러써서 전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것은 코끝과 턱 정도였다. 웬 수염? 안 어울리네.
웃긴 것은 얼굴의 반을 가려 겨우 보이는 그 코 끝이 한 손가락으로 톡 쳐보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코 끝에서 이어지는 유려한 선을 지나 보이는 분홍빛 입술이 부드러워 보였다. 딴 생각을 멈추고 창밖을 보았다. 비가 그새 더 세게 내리고 있었다.
겨우 쉴 곳을 찾아온 사람을 내쫓기에 이 날씨는 너무 가혹했다.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마감 시간에서 5분도 지나지 않았고, 잠깐이라면 짬을 낼 여유는 충분했다.
"아 그리고... 정말 죄송하지만 배가 너무 고파서요. 혹시 추천메뉴 있을까요...?"
"어... 네. 알겠습니다."
이상한 사람.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 생각하면서도, 비를 맞아 축축한 남자의 후드를 보니 도저히 오늘의 추천메뉴였던 호박파이도, 추천커피였던 호박라떼도 매진이라는 말이 입 밖에 나오질 않았다. 그렇게 거절하면 죽을 때까지 후회할 것만 같았다.
왜지... 왜...?
스스로 되뇌면서도, 손은 착착 움직이고 있었다. 이렇게 된 거 내일 팔 반숙케이크를 나눠 드려야겠다. 어차피 원두도 채워야했다. 조금 더 움직이면 될 일이다.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손이 빠른 편이라 반숙케이크와 커피는 금방 완성되었다. 그는 맛있게 드시라며 서빙을 마치고 바테이블 안으로 들어갔다. 내일 팔 나머지 반숙케이크를 냉장고에 넣고 그라인딩 머신 청소를 마무리했다.
돌아보니 남자는 정말 행복한 미소를 띠며 케이크와 커피를 먹고 있었다. 아무로는 손님들의 칭찬에 익숙했고 자신이 요리에 능숙한 편임을 잘 알았다.
하지만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들을 볼 때 그는 보람을 느꼈다. 공안도 버본도 없는 포와로에는 바깥의 어떤 위협도 불안도 침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하루 두시간 겨우 취하는 수면 속에서 지치지 않을 리가 없다. 하지만 이렇게 평화로운 시간이 후루야를 채찍질했다. 사람들의 삶이 이렇게 흘러가길 바랐다. 공안도, 어둠 속의 조직도 이 사람들의 빛을 깨드려선 안 된다. 그 의무감이 오히려 기꺼웠다.
설거지를 마무리하려는데 남자의 감사 인사가 들렸다. 아무로는 무의식적으로 미소 지었다.
"정말 감사드려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은 오랜만이라... 어떻게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은데, 제가 기타를 조금 치거든요. 혹시 듣고 싶으신 곡이 있을까요?"
아무로는 그가 특이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몇번째인지 세는 것을 포기했다. 밖에는 계속 비가 내렸다.
"그럼... 비틀즈의 'yesterday', 부탁드려도 괜찮을까요?"
기분 탓이었을까. 남자가 멈칫한 것 같았다. 가능하다며 고개를 끄덕인 후 시작된 연주가 포와로에서 빗소리와 섞여 들었다. 아무로는 눈을 감으며 천천히 졸기 시작했다. 빗소리 때문인지, 최근 극악의 수면시간 때문이었는지, 졸음이 밀려왔다. 아무로는 눈을 뜨려고 노력했지만, 어느샌가 엎드려 연주를 들으며 잠들었다.
연주가 끝났다. 아무로는 잠이 들었으나 의식이 깬 상태였다. 남자가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아무로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가 천천히 손을 들어 후루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루야는 사무치게 서러워졌다.
건강해야지, 제로.
그럼 네가 날 두고 가면 안 되잖아, 히로.
후루야는 대답하고 싶었지만 의식 속에서만 가능했다. 일어나고 싶었다. 진짜 너인지 묻고 싶었다. 그런데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후루야는 엎드려 눈도 뜨지 못하고 눈물만 흘렸다.
그렇게 우는 후루야의 뺨에 히로미츠가 손바닥을 대었다. 그는 후루야의 눈물을 엄지손가락으로 살짝 닦았다. 너구나. 너였어, 히로미츠. 후루야의 입가로 히로미츠가 나비가 앉듯이 다정한 입맞춤을 내렸다.
잘 자, 제로.
안 돼, 히로. 아직 가지 마. 조금만 더. 제발.
아무로는 눈을 떴다. 희미한 종소리가 들렸다. 벌떡 일어나 문으로 달려갔다. 할로윈 장식을 담은 상자가 발에 챘다. 아무로가 문으로 넘어지면서 종소리가 포와로 안팎으로 요란하게 울렸다.
아무로는 천천히 일어나면서 얼굴을 찡그렸다. 이상했다. 엎드려 졸고 있었던 것도, 미친 사람마냥 가게에서 뛰어나오다 넘어진 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로는 손등으로 자신의 뺨을 남은 물기를 닦아냈다. 울었나...? 왜? 아무로는 무의식적으로 길가를 빙 돌아보았다. 해가 져 어두워진 10월 말의 싸늘한 밤거리에 찬바람이 스쳤다. 어느새 켜진 가로등만이 아무로를 비추고 있었다.
물비린내에 고개를 드니 구름이 빽빽했다. 비라도 오려는 모양인지. 아무로는 앞머리를 쓸어올리며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시계를 보면 마감 시간으로부터 한 시간 가량 지나있었다.
가게 안은 언제나의 포와로였다. 냉장고를 확인해보니 내일 팔 케이크의 준비는 완벽했고, 원두도 부족함 없이 가득했다. 다만 바테이블 끝자리의 의자가 어째선지 꺼내져 있었다. 다른 의자는 모두 테이블에 거꾸로 올려져 있었기에, 아무로는 그 의자를 마지막으로 올려두었다.
아무로는 할로윈 장식 상자를 창고에 넣고 뒷문으로 나왔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인 덕분인지, 기운이 났다. 그래도 앞으로는 컨디션을 조절해야겠어, 아무리 그래도 가게에서 곯아떨어지다니. 후루야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거리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