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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히로] 12시의 기적단편 2020. 12. 29. 23:59
*조직궤멸 후, 사망 및 교통사고 소재, 급한 마무리 주의해주세요.
*둘은 중학생 때부터 연인인 설정이에요.
레이는 며칠째 이어진 야근으로 퀭해진 눈꺼풀 위를 손가락으로 눌렀다. 몇초 누르던 손가락을 떼고 고개를 드니 이미 어둠에 잠긴 사무실에 남은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그는 부하가 퇴근하기 전 사다놓은 아이스 아메리카노의 남은 한모금을 털어넣었다. 이미 얼음이 녹은 지 한참 지나 아이스라기엔 미지근했다. 그러나 레이는 미식가가 아닌, 당장 생존을 위해서 입을 채우는 게 당연한 삶을 살아 그리 개의치 않았다. 이제는 없는 버본이나 아무로 토오루야 커피 맛을 따질지도 모른다.
아니, 버본이라면 이런 것도 커피냐며 그 자리에서 부하의 머리에 쏟아부었을지도 모른다. 시계는 벌써 밤 12시에 가까웠다. 나머지는 내일 아침에 와서 하는 게 차라리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 레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핸드폰의 알림이 반짝였다.
아무 생각 없이 메시지함을 연 레이가 다시 메시지를 읽었다. 분명히 읽었는데 내용이 인지가 안 된다. 드디어 미친 건가. 레이는 미간을 좁히고 다시 폰을 보았다.
[제로. 드디어 내일부터 고등학생이네! 늦지 않게 와야돼!]
레이는 번호를 확인했다. 잊을 수도 없는 번호였다. 이 세상에 있어서는 안 되는 번호이기도 했다. 레이는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다. 함정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들었다. 누가 들어도 미친 소리였다. 하지만 그보다 손가락이 먼저 움직였다.
레이는 어느새 핸드폰을 기도하듯 움켜쥐고 있었다. 그렇게 신호음이 길어질수록 흥분으로 머리에 쏠렸던 피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역시 피곤해서 제정신이 아니었나 보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스스로 자조하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갑자기 목소리가 들렸다.
'응... 제로... 뭐야? 이렇게 늦게...'
너무 놀라면 심장이 멈출 수도 있다는 걸 레이는 그때 처음 알았다. 졸음기 가득한 목소리에 레이는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여보세요..? 제로...?'
"너... 누구야? 뭔데 히로의 번호로 문자를 하고, 히로의 목소리로 전화를 받지? 소속을 밝혀라."
'뭐라는 거야... 밤 12시에 이상한 소리나 하고... 내일 늦지 않게 오기나 해! 난 이제 잘 거니까...'
뚝 끊기는 전화에 레이는 다시 전화를 걸었지만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이오니-'란 안내음만 들렸다. 그렇게 여러 번 전화를 건 후 레이는 어느샌가 힘이 빠진 손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흥건했다.
전속력으로 달리기를 마친 것 같은 탈력감이 온몸을 덮쳤다. 오랫동안 소탕하기를 소망했던 조직을 무너뜨릴 때조차 이렇게 긴장하진 않았었다. 어쩌면 잠시 졸았던 걸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이미 이 세상에 없는 연인이 자신에게 전화를 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할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렇게 다음날이 됐고, 레이는 홀로남은 사무실에서 또다시 12시에 히로미츠의 메시지를 받았다.
[오늘 입학선서 멋있었어. 역시 제로! 박수소리에 얼굴만 안 찌푸렸으면 완벽했을거야~]
레이는 미간을 약하게 좁히며 메시지를 노려보았다. 어떤 놈인지 몰라도, 옛연인을 이용해 자신을 흔들려하다니 후루야 레이를 우습게 봐도 너무 우습게 봤다.
'제로?'
"나야."
레이는 이 목소리를 시험하려했다. 그럴 리가 없지만, 만에 하나 자신과 히로미츠만이 아는 추억을 안다면-
그렇다면, 어쩔 거야? 레이는 자신을 비웃었다.
'왜 갑자기 전화야? 공부하던 중 아니었어?'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뭐...? 갑자기 닭살돋게 이상한 소리를 하네, 제로. ...근데 사실은, 나도 제로 목소리 듣고 싶었어.'
레이는 이 목소리가 자신에게서 공안의 정보를 캐내기 전까지 이 놀이에 어울리려고 했다. 하지만 어린 히로미츠의 목소리를 듣고 그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깨달았다.
이게 함정이 되기 전까지 자신은 벗어날 수 없다. 이토록 듣고 싶었던 목소리인데, 벗어날 수 있을 리 없다.
레이는 자조하며 히로미츠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보니 고등학교 입학 첫날, 선서를 마친 그에게 히로미츠가 작게 손을 흔들었었다.
그게 귀여워서 웃으려는데 웬 놈이 히로미츠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얼굴을 들이미는 게 보였다. 그래서 얼굴을 찌푸렸었다. 박수소리때문인 줄 알았구나, 히로는. 레이는 저도 모르게 웃고 있었다.
'난 이제 졸려서 그만 자야겠어... 제로도 어서 자, 너무 늦게까지 공부하지 말고.'
"...다시 통화해도 괜찮을까?"
'무슨 소리야 진짜. 아까부터 계속 이상한 거 알지. 우리가 언제부터 그런 거 정해놓고 통화했었나. 제발 잠 좀 자.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응. 잘자, 히로."
'내일 봐, 제로.'
몇 초 고요하던 통화가 끊겼다. 히로미츠는 내일 보자는 말을 기다렸을 것이다. 그들이 고등학교 때 종종 했었던 통화의 끊기 전 약속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레이는 그 말만은 차마 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 내일은 이미 없었으니까.
레이는 책상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보았다. 차마 닦을 생각도 못 하고 손에 들린 휴대폰만 기도하듯 쥐고 있었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가 지켜준 자신의 목숨을 그가 사랑한 세상을 지키는데 쓰며 사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가 세상에 없어도 그의 형제가 사는 이 나라만은 마지막까지 지켜보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이 목숨이 다해도 네 얼굴을 볼 자격은 생길 거라 생각했다. 이제까지 저질렀던 수많은 죄들을 레이는 잊지 않았다. 그래서 단 하나, 바라는 것은 죽음이란 안식 후에 만날 연인으로 충분했다. 그러니 그가 죽은 후 아무리 긴 시간이 흘러도 괜찮았다. 그래야했다.
하지만 아니다. 그럴 수 없다. 후루야 레이 또한 인간이었다. 단 한 번도 신을 원망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왜 제게만 이렇게 가혹하신지 울부짖고 싶었던 적이 없을 리 없다.
그는 성당의 자비로운 마리아상을 지나가며 볼 때마다, 신사의 높디높은 붉은 문 앞을 지날 때마다, 교회의 첨탑 끝 십자가를 볼 때마다 신을 원망했다. 신에게 사랑받지 못 하는 자신을 억지로 삼켰다. 이 또한 자신의 운명임을, 그렇게 체념해왔다.
이 나라에서 그는 몇번이고 잃어왔다. 그가 마음을 준 사람들은 다들 그렇게 떠났다. 어릴 적의 은사부터, 연인을, 친구들마저도 봄에 지는 벚꽃처럼 그의 곁에서 허망하게 떠나갔다. 그는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는 법이라는 말을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그렇게 신을 증오했다.
노력할수록 마음이 무너졌다. 받아들이려 할수록 주위의 찬란한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게 되었다. 어쩔 수 없다고 체념하려 할수록 자신에 대한 분노가 치밀었다.
자신이 부족해서, 모자라서 그런 일이 벌어졌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서, 그는 늘 자신을 채찍질해왔다.
[내일 드디어 문화제네. 우리 열심히 했으니까 잘하겠지, 그치? 힘내, 제로.]
그러나 다음날 온 메시지는 어쩐지 한참 후의 내용이었다. 레이는 의아해하며 전화를 걸었다.
"내일이 문화제야?"
'제로, 왜 그래? ...너무 긴장했어? 이상하네. 우리 오늘 연습 마무리할 때는 원래 기타치던 애 무시하더니, 역시 집에 가서 생각하니 너무했나 싶어?'
"...아니, 그럴 리가 있어? 난 언제나 최고인데."
'맞아. 제로는 언제나 최고지.'
히로미츠는 단 한 번도 레이에게 빈말로도 잘난척한다고 비꼬지 않았었다. 오히려 고개를 뻣뻣하게 드는 레이에게 맞장구를 치며 동조했었다.
레이가 학교에서 좋은 의미건 싫은 의미건 눈에 띄는 걸 알았다. 그래서 히로미츠는 레이가 학교에서 날을 세우는 이유도 알았다. 그렇게 자신을 곁에서 지탱해주는 사람이었다.
레이는 학교를 다닐 때 주기적으로 히로미츠와 봉사활동을 다녔다. 학교에서 꽤 떨어진 곳의 보육원이었다. 처음에는 경계하던 그들도 중학교의 마지막 학년쯤에는 히로미츠가 오길 손꼽아 기다렸었다.
수녀님께서 그 아이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고 해서 그들은 종종 베이스와 기타를 메고 음악을 하곤 했다. 곡은 다양했다. 신을 찬양하기도 했고, 일본의 동요를 치기도 했고, 팝송을 들려주기도 했다.
둘의 노래는 극구 사양하긴 했지만, 그조차도 서로 상처가 되기보다 너무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가족이란 게 이런 것일까 생각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문화제에서 기타를 치던 아이가 손을 다쳐 레이가 대타로 나가게 됐을 때도 큰 문제가 되진 않았었다. 히로미츠의 베이스와 레이의 기타는 이미 오래 합을 맞춘 상태였다.
뭐가 거슬렸는지 원래 기타였던 아이가 마지막 날 레이에게 시비를 걸었고, 레이는 그걸 무시했다. 그걸 히로미츠가 나서서 웃음으로 무마했던 이야기일 것이다.
"너 그때 귀여웠었지. 코드 틀릴까 봐 그렇게 걱정하더니 무대 위에선 펄펄 날고. 그래서 다른 학교까지 유명해져서 한동안 고백 받느라고 고생했었잖아. 그때..."
고요함에 레이는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제로? ...무섭게 왜 그래?...'
"아니. 그럴 거 같다고. 그냥 감이야."
'난 또 뭐라고. 내가 고백때문에 고생한다니, 무슨 말인가 했어. 어차피 난 네 옆에 있으면 보이지도 않을걸~.'
"반짝이는 모든 것이 황금은 아니잖아."
'...제로. 넌 나한테 황금이야. 그런 말은 하지 마.'
"...응. 히로. 히로도 나한테 언제나 히어로야."
그 말에 히로미츠는 허둥지둥거리며 어릴 때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하냐며 툴툴거렸다. 레이는 사랑스러움에 가슴이 아렸다. 그가 옆에 있을 때 더 많이 사랑한다고 전해야했다. 그를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줘야했다.
어려서, 잘 몰라서, 쑥스러워서, 그런 핑계들로 히로미츠에게 자신을 표현하는 일을 주저해선 안 됐다. 레이는 끊긴 휴대폰을 보며 기도했다. 네게 다시 한번 전할 수 있으면, 그때는 질리도록 널 사랑한다고 말할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한다는 말을 다 뺏어서라도 네게 줄 것이다.
그렇게 세 번의 통화가 끝나고, 레이는 이 이상한 통화의 규칙을 깨달았다. 우선, 레이가 먼저 히로미츠의 번호로 전화를 하거나 메시지를 보낼 수 없었다. 전화를 하면 없는 번호라는 안내음을 들었고, 메시지를 하면 수신실패로 되돌아왔다.
오로지 밤 12시, 히로미츠의 메시지가 먼저 와야만 했다. 그 메시지를 받은 후에 거는 전화에만 히로미츠가 응답했다. 레이는 어느샌가 밤 12시를 기다렸고, 히로미츠의 메시지가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그들은 일주일 동안 고등학교를 다니며 겪었던 시답잖은 추억들을 공유했다.
[제로. 당분간은 연락 못 할 것 같아. 미안해.]
다급하게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음이 끊기지 않았다. 왜? 왜 벌써? 히로미츠는 공안 경찰로 조직에 잠입하려는 것 같았다. 말려야했다. 그 길만은 가선 안 된다. 레이는 이를 악물었다. 제발, 제발 받아달라며 히로미츠에게 빌었다.
하지만 히로미츠는 끝내 받지 않았다. 레이는 억눌린 짐승 같은 소리를 내며 자리에서 무너졌다. 자고 있던 하로가 놀라 그에게로 달려왔다. 하로는 바닥에 엎드려 우는 레이를 달래려 했지만 레이는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었다.
"경시님. 괜찮으십니까? 안색이..."
"내 안색 걱정할 시간에 보고서나 마무리 해."
"네. 경시님."
부하가 물러가고 레이는 눈가를 손으로 눌렀다. 아까 화장실에서 손을 씻을 때 본 자신의 얼굴이 얼마나 엉망인지 이미 알았다. 아는데도 레이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처음에는 목소리만 들어도 좋았다. 그 짧은 통화로 살 것 같았다. 숨이 트였다. 레이는 자신이 스스로를 그렇게 억누르며 사는지 히로미츠와 통화하기 전까지 몰랐다.
한번 몰랐으면 끝까지 몰라야했다. 숨통이 트이는 감각을 한번 맛봤는데, 다시 지옥에 처박혔다. 그는 이 자리에 없는 히로미츠가 걱정되어서 미칠 것 같았다. 레이는 히로미츠가 자신이 없는 곳에서 코드네임을 받으려 했던 일들을 조직이 무너지고서도 나중에야 알았다.
그때 처음으로, 레이는 깊은 분노를 느꼈다. 적어도 소속된 요원을 그렇게까지 절벽으로 밀어붙였을 거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공안은 국가기관이었고, 레이는 공안의 일 처리 방식을 아주 잘 알았다.
그들에게 인간은 단 두 종류였다. 국가에 도움이 되는가, 되지 않는가. 히로미츠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많지 않았다. 천성이 다정하여 공안이 자신을 시험할지라도 조직을 선택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공안도 그것을 알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자신의 투입을 나중에 알려 히로미츠의 목을 졸랐다. 히로미츠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있었다.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만에 불과했다.
선임 요원이 죽은 게 히로미츠의 탓도 아니었는데 그에게 선택을 강요한 건 시작에 불과했다. 더 많은 사람의 희생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라며 히로미츠에게 범죄를 강요했다. 그러면서도 히로미츠를 믿지 못해 조직을 선택하면 레이의 정체를 조직에 알리겠다고 협박했었다.
굳이 레이가 아니더라도 히로미츠가 조직을 선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공안은 확실한 보험을 원했다. 어쩔 수 없이 발각되는 상황이 닥치기 전까진 히로미츠가 버텨야만 했다. 공안은 히로미츠가 죽기 전까지 그의 쓸모를 평가하고 재단했으며 의무를 다하길 바랐다.
그걸 위한 목줄이 자신임을 깨달았을 때, 레이는 모든 것을 부수고 싶었다. 연인을 지키지 못한 것도 모자라 벼랑으로 내모는 목줄이 자신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 히로미츠의 형이 남아있고, 자신을 지켜준 그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레이는 선택해야 했다.
그래서 레이는 자신이 저지른 죄의 속죄를 위해, 히로미츠의 뜻을 잇기 위해 모든 것을 자신에게 묻기로 했다.
그러나 다시 이 기억이 일깨워지고, 레이는 아무것도 용서할 수 없는 자신을 마주했다.
그렇게 지옥 같은 시간이 흘렀다. 2주만이었다.
[제로.]
"히로. 도망쳐."
'......'
"제발. 제발, 히로. 히로미츠. 도망쳐, 제발! 난 어떻게든 살아남을 테니까, 제발 도망쳐줘. 제발... 제발 부탁이야..."
'.......'
"히로, 제발..."
레이의 애원에도 히로미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레이는 울면서 빌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그의 곁에 있을 수 없는 자신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어쩔 줄을 모르며 우는데, 히로미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제로. 나... 사람을 죽였어.'
"......."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더라. 사실 이게 처음도 아니야. 공안이 모든 걸 해줄 수는 없는 거잖아, 그렇지? 그러니까... 괜찮아. 나는.'
"히로미츠..."
'나는 괜찮아.'
그렇게 히로미츠는 2주만의 통화를 끊었다.
히로미츠. 히로. 대답해줘. 내가 어떤 선택을 해야 했을까? 어떻게 하면 널 살릴 수 있었을까? 내 어떤 점이 부족해서 널 그렇게 불안하게 만들었어? 왜 내가 갈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어?
[미안해, 후루야. 녀석들한테 내가 공안인 걸 들켰어. 이제 내가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에는 없는 것 같다. 안녕, 제로.]
'그' 문자였다.
레이는 자신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그는 그저 전화를 걸고, 신께 기도할 뿐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괜찮았다.
이미 꿈같은 시간들이었다. 12시의 기적이 신의 변덕으로 내린 기회라고 해도 괜찮았다. 그의 목소리를 살며 다시 한 번이라도 들을 수 있는 날이 오리라 꿈꾼 적 없었다.
그러니 만약 그를 제게 돌려주실 수 없다면, 그에게 제 마지막 진심만은 듣고 가게 해주세요.
내게 기회를 주세요, 신이시여. 당신이 저를 한 번이라도 가엾게 여기신다면, 제발 제게 단 한 번의 기회를 주세요.
긴 신호음이 가고, 더는 온몸의 감각조차 느끼지 못할 정도로 떨고 있는 손 위의 핸드폰으로 목소리가 들렸다.
'제로.'
"사랑해."
'......'
"사랑해. 널 사랑해, 히로미츠. 네가, 알 거라고 생각해서, 말하지 못했어. 그래선, 그러면, 안 됐는데..."
목이 메었다. 레이는 울며 더듬더듬 말했다. 그는 억지로 뺨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마지막 기회를 눈물로 날리고 싶지 않았다. 이를 악물고 최대한 히로미츠가 들을 수 있길 바라며 그는 말을 이었다.
"이것만은 기억해줘. 나는, 널 사랑해... 히로, 날 기다려. 무슨 일이 있어도 날 기다려야돼."
'...그러다 너까지 위험해져.'
"안 돼!! 히로, 너마저 날 버리면 안 돼. 날 버리지 마!"
'제로... 안녕.'
레이는 어둠으로 물든 휴대폰 액정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절망으로 물들어 지옥에 떨어지는 자신을 보았다. 또다시,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그는 비척비척 일어나 문밖으로 나섰다. 어디를 가는지도 몰랐다. 그저 손에 휴대폰을 들고서 정처 없이 걸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딘가에 히로미츠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았다.
레이는 12월의 거리를 걸었다. 모두가 행복에 물들어 있었다. 이 행복들을 분명히 지켜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때도 있었다. 어차피 누군가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아무 것도 없는 자신이 적격이라고 생각했다.
모든 사람들에게 소중한 것이 있는 세상이다. 자신에게는 남은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면, 몰라줘도 상관없으니, 자신이 세상을 지키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닐 거라 생각했다.
성탄절을 기다리며 울리는 캐롤,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들, 행복을 이야기하는 가족들, 미래를 꿈꾸는 친구들이 그 거리에 있었다.
그렇다면 후루야 레이가 가야 할 곳은, 어디일까.
"세상에, 사람이-!"
"119에 전화해요!!"
"사람이 차에 치였어요!!! 구급차!!!!"
레이는 바닥에 퍼지는 붉은 피를 보았다. 추웠다. 히로미츠도 그랬을까. 내가 없는 곳에서, 스스로 너의 심장을 겨눌 때, 너도 이렇게 추웠을까? 레이는 자신의 피 위에 녹아내리는 눈송이를 보았다.
국가에 충성과 의무를 다하고 죽는 것도 좋지만, 네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죽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닌 듯하다. 레이는 웃으며 눈을 감았다. 눈을 떴을 때, 그는 히로미츠를 볼 수 있길 소망했다.
레이는 눈을 떴다. 그는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이번에도 살았다. 코끝에 들어오는 독특한 소독약 냄새에도 큰 감흥은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 질긴 목숨이었다. 어쩔 수 없이, 국가를 위해 바쳐야될 목숨인 모양이다.
화려하게 다치긴 한 모양이었다. 오른팔과 오른쪽 다리에 깁스가 있었다. 레이는 자신이 한심했다. 죽으려면 확실히 죽든가, 이렇게 되면 괜히 후한이 생긴다. 자살하려던 건 아니지만 피하지 않은 것도 사실이라 보고서는 어떻게 쓸지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재활운동을 언제부터 시작할지 계산하며 몸을 일으키려던 때였다.
누군가가 옆에서 침대 각도를 조정해주었다. 레이는 눈을 굴려 그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역광때문에 정확히 보이지 않아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레이에게 물컵을 입가에 대주었다. 일단 목이 말라 얻어 마시고 눈을 깜빡여 얼굴을 확인했다.
".......히로?"
"잘 잤어? 우리 할 얘기가 좀 많지?"
안 죽었다고 생각했는데 죽었나보다. 레이는 이미 마신 물에 사레가 들릴 것 같았다. 눈만 크게 뜨고 정장 차림의 히로미츠를 바라보았다. 히로미츠는 그런 레이의 눈동자에도 별말 없이 웃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오한이 들었다. 그때 노크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후루야 경시님. 아, 자네도 있었나."
"카자미 경부님."
레이는 카자미에게 거수경례하는 히로미츠에게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그런 레이와 히로미츠를 번갈아보던 카자미가 갑자기 빙긋이 웃더니 뒷걸음질 쳤다.
"제가 낄 자리가 아닌 것 같군요. 나중에 뵙겠습니다, 경시님."
그렇게 문을 닫고 나가는데 레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히로미츠를 보았다.
"어... 여기 천국 맞지?"
"너..."
그때서야 레이가 고개를 돌려보니 히로미츠가 레이의 멱살을 붙들고 울고 있었다. 팔을 올려 안아주려는데 올라가지 않는 오른팔에 현실임을 자각했다.
"...말도 안 돼."
"너 진짜, 죽으려 한 거야? 날 버리고?"
"네가 먼저 날 버렸었잖아."
레이는 울컥해 저도 모르게 말을 내뱉고 멈칫했다. 히로미츠의 상처받은 표정에 레이는 어느새 사과하고 있었다.
"아니, 어, 그렇게 말하려던 건 아닌데..."
"넌 매번, 희생하려고 하잖아. 그런데 내가 한 번 그러려고 한 게 그렇게 잘못이야? 난 네가, 잘못될까 봐 그런 건데..."
그 말에 레이는 히로미츠가 말하는 것이 이번 교통사고가 아님을 깨닫고 정색했다.
"잘못이야."
"제로..."
레이의 단언에 히로미츠는 말을 잇지 못하고 입술을 깨물었다. 고요한 병실에 가습기가 돌아가는 소리와 히터가 작동되는 소리만 울렸다. 레이는 자신의 옆에 앉아 고개 숙인 히로미츠의 손을 붙들어 잡았다. 그 손길에 고개를 든 히로미츠의 이마에 레이의 이마가 맞닿았다.
"내가 왜 이 나라를 지키려고 한 건데. 네가 있어서잖아. 그러니까 넌 잘못한 거야."
"...미안해."
"알면 됐어."
둘은 서로를 들여다보며 웃었다. 레이는 눈을 감았다. 그 속에서 그 날의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레이가 옥상에 올라가 문을 열었을 때, 옥상에는 아무도 없었다. 혼란에 빠졌을 때, 히로미츠와 아카이가 구석에서 나왔다. 둘은 조직원일 경우 발포할 생각이었다며 레이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히로미츠는 포기하지 않고 FBI의 도움과 공안의 협조로 도망쳤다. 죽음을 조작하는 건 큰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본에서 일본인의 죽음을 조작하는 건 공안의 특기다. 잠입이 멈춰서 이후 히로미츠의 계급은 크게 승진하지 못했지만, 레이는 그걸로도 충분했다.
공안은 어찌 됐건, 레이가 조직에 남아 첩보원 역할을 할 수 있는 보험으로 히로미츠가 역할을 수행하면 됐다는 식이었다.
자신이 겪었던 모든 일이 단순히 꿈이라거나 과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히로미츠가 살아있는 지금의 모든 것이 현실일까 생각해보면 의아한 구석들도 있었다.
"히로미츠. 내 곁에 있어, 언제까지나."
"...기꺼이, 제로."
그러나 가끔 인생에는, 이런 기적이 있어도 그리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레이는 히로미츠의 눈가에 입을 맞췄다. 그런 레이에게 히로미츠가 뺨을 장밋빛으로 물들이며 미소 지었다. 그의 모든 행복이 그곳에 있었다.'단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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