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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버번히로] 어떤 사람 A
    단편 2023. 3. 2. 00:04

    * 전편  : https://rsbwith.tistory.com/m/75 (어떤 내기)

    * 조직에서 자란 찐 버번 X공안 히로미츠










    남자는 예상한 것처럼 자존심 상해하는 기색도 없이 손을 거뒀다. 스카치. 최근 코드네임을 얻은 스나이퍼로 소개받았다. 가타부타 말도 없이 보내진 메일에는 단순히 외적인 정보 외에 불필요한 의견은 적혀있지 않았다. 주의할 사항을 적는다고 해서 그걸 들어줄 의향 따윈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언급조차 없는 것은 신기하긴 했다. 그만큼 무던한 성격이든지, 아니면 참을성이 뛰어나든지, 그도 아니라면 책임감이 있는 것인지. 어느 것이든 조직에 어울리는 성질의 것은 아니다.

    실제로 만난 스카치는, 자신보다 눈높이가 살짝 높은 탓에 치켜 올라간 눈매가 사나워 보였다. 그는 버번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빙긋이 웃었다. 주차장 구석에서 기타 케이스를 메고 있던 남자는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와 버번에게 넉살 좋게도 손을 내밀었고, 버번은 그저 스카치를 지긋이 들여다보며 그 손을 마주 잡지 않았다.



    “네가 버번? 난 스카치.”
    “…….”
    “잘 부탁할게, 선배님.”



    그 말을 끝으로 조직이 준비한 차의 조수석 문 앞에 선 남자는 열어달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억지로라도 손을 잡으며 치대는 것도 없고, 버번을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경외심도 두려움도 없다. 버번을 만난 수없는 조직원들이 그의 얼굴에 감탄하거나, 어린 나이에 조직의 5명 안에 드는 코드네임을 가진 것에 불편해하는 것도 없이 그저 처음 만난 동료를 대하는 것처럼 담백한 태도다.

    뒷좌석에 기타 케이스를 둔 남자는 말하기도 전에 안전벨트를 맨다. 버번이 운전대를 잡자 창문 밖으로 고개를 돌린 스카치는 좌석에 고개를 기대고 눈을 감는다. 버번은 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시동을 걸었다. 출발하고 얼마지 않아 깨닫는다. 스카치는 이 밤에 그의 금발을 보고도 국적이나 출신에 대한 추측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룸미러로 흘끗 옆을 보면 어느샌가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자는 척을 한다. 조금은 생소하지만 나쁘지 않은 무관심이다. 이런 적당한 거리감을 처음 만난 남자에게서 느끼게 되리라 생각한 적은 없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버번은 답지 않게 손을 뻗어 음악을 틀었다. 살인하러 가는 밤의 도로에 흐르는 클래식 바이올린 선율 속에, 버번은 차의 속도를 높였다.







    **







    스스로 말이 많은 편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지만, 그 임무에서 스카치처럼 자신에게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스카치는 고요하고 잔잔했다. 보스가 마구잡이식으로 코드네임을 부여하지 않는 건 알았지만, 그 이름을 받기 위해 태어난 남자 같았다. 느긋하고 여유로웠던 태도는 스코프를 들여다본 순간부터 사냥감을 노리는 맹수의 눈으로 변한다.

    그런 눈을 하는 걸 보면 아예 감정이 거세된 사람은 아닌 듯한데, 스카치는 임무가 끝나자마자 또 무감한 눈동자로 돌아가버렸다. 지금은 앙숙이 된 라이마저도 자신을 처음 봤을 때는 금발을 뚫어져라 보았었다. 유치한 건 안다. 하지만 스카치가 다시 자신에게 말을 붙이길 기다렸다. 그리고 혼자만의 싸움은 스카치가 웃으면서 다음에 또 봐, 하고 차에서 내려 세이프 하우스로 돌아간 순간 끝이 났다.

    그 후 버번은 생각보다 놀랍지 않은 사실을 알게 됐다. 그가 기억도 나지 않는 시절부터 자라온 이 조직에서, 스나이퍼란 종자들은 하나같이 어딘가 별난 구석이 있었다. 사람 죽이는 게 뭐 대수라고, 그렇게 유난을 떨어대는지. 특정한 조건을 요구하며 특별대우를 요구하는 거야 코드네임을 가진 자들이라면 늘 하는 짓거리다. 하지만 스나이퍼들은 그런 코드네임들 사이에서도 유별난 구석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중에 일처리가 깔끔하고, 약속을 어기지 않고, 무난한 성격의 스나이퍼가 등장한 것이다. ‘그’ 진마저도, 되도록이면 스카치를 팀메이트로 선호한다는 게 알음알음 퍼졌으니 인기가 하늘을 찌를만했다. 버번은 그 이후 두 달 동안 스카치의 코 끝도, 아니 후드의 끝자락도 보지 못했다. 그 사이에 그 빌어먹을 라이하고는 최대한 적게 팀을 짜느라 고생했는데, 보람도 없이 스카치는 늘 예약으로 꽉 차 있는 상태였다.

    뭐가 됐든 스카치와 일할 거라고 엄포를 놓는 버번을 보며 진을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큰 실적이 되지 못하는 엄호 사격을 위해 키안티나 코른을 버번에게 붙여주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들은 마음껏 살인하지 못하는데 불만이 쌓여가고 있었다. 스카치가 두 달 동안 죽인 사람의 수가 둘의 임무보다 많았으니 신경질적으로 구는 것도 당연했다. 하루 걸러 키안티와 코른에게 피를 못 보고 비명소리를 듣지 못해 괴롭다는 불평을 듣는 것도 즐거운 일은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스카치는 별 불만 없이 메일로 [了解] 한통 대꾸하고 끝이었다. 이 놈의 반만 다른 스나이퍼들이 닮았으면 좋았을 텐데. 의미 없는 가정을 하며 진은 이마를 짚었다. 시끄러운 애새끼에게 원하던 술을 마시게 해 줄 테니 입 다물란 말을 휴대폰 너머 짓씹듯 뱉었다. 대꾸도 없이 뚝 끊어진 액정을 보며 이 놈이나 저 놈이나, 혀를 차는 진의 옆에서 워커만이 눈치를 볼 뿐이었다.










    **









    두 달 만에 만난 스카치는 조금 파리한 안색이다. 하기야 코드네임을 받고부터 거의 쉬지 못했다고 들었다. 새롭게 코드네임을 받은 자에 대한 호기심부터 믿을만한 팀메이트에 대한 선호까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엔 폭발적인 관심이었다. 진은 쓸데없는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니 버번이 스카치를 집요하게 요구했단 말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늘 임무에 대해서 제가 보낸 메일 읽어봤어요?”
    “……응.”
    “대단하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중요한 거예요.”
    “알아.”



    진이 별 언급 없었던 걸로 미뤄보면 크게 화낸 것 같진 않지만, 조금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총을 조립하는 스카치를 마주 보고 앉아 종알거리는 버번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하는 남자가 서운하다. 그야 살인이 더 즐겁긴 하지. 버번도 알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시위할 것까진 없지 않나. 혼자서 한번 만났던 남자의 여러 가지 뒷조사를 하다 보니 모르는 새 정이라도 든 건지 두 달 전 살가웠던 남자가 눈을 마주쳐주지도 않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버번이 앞에 있든 말든 묵묵히 할 일을 진행하는 남자가 뒤집어쓴 후드 때문에 보이는 거라곤 눈가까지 내려앉은 머리카락이다. 조금 간지러운지 눈가를 찡그린다. 무의식이었다. 손이 먼저 나갔다. 버번을 아는 사람이라면 듣고도 믿지 못할 변명이었다. 정정한다. 얼굴이 보고 싶었다. 그야 굳이 엄호사격이 필요한 임무를 골라서, 그것도 스카치를 지명해 가면서 불러냈다.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어떤 표정인지 궁금했다.

    채 닿기도 전에 거칠게 쳐낸 손에 마찰음이 울리고, 당황한 표정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맞은 손이 얼얼했다. 스카치는 약간 얼빠진 표정으로 버번을 쳐다보다가, 곤란한 듯 약한 신음소리를 냈다.



    “괜찮아?”



    아무래도 손이 엇나가면서 뺨에 생채기가 생긴 모양이다. 차마 손을 대지도 못한 스카치가 안절부절못하며 버번을 마주 본다. 내장이 칼에 찔린 것도 아닌데 큰일이라도 난 것처럼 호들갑 떠는 건 웃겼지만, 미안해하는 모습을 보니 골려주고 싶어졌다.



    “상품을 훼손하면 어떡해요?”
    “넌 무슨, 사람을 물건처럼… 가만있어 봐, 예쁜 얼굴에 흉 지면 아깝잖아.”
    “… 내가 예뻐요?”



    투덜거리며 뱉는 말에 철없는 아이의 투정을 듣는 것처럼 아연한 표정이다.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포기한 표정으로 버번의 얼굴에는 손도 대지 못하고 스카치는 고개를 움직인다.

    버번의 질문에 어둑한 밤 아래 숨이 닿을 만큼 가까이서 그의 얼굴에 집중하던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청회색의 맑은 눈동자. 두 달 전과 달라진 것 하나 없는 눈동자는 버번의 시선을 피하지도 않고 맞부딪힌다. 그 순간, 그 눈동자 속에 있는 것은 버번이었을까, 아니면 한 남자였을까. 채 깨닫기도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

    평온하던 심장에 퐁, 하고 돌이 수면에 맞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예뻐, 너.”
    “… 어린애도 아니고, 이 정도는 알아서 해요.”
    “그래.”



    순수한 찬탄의 칭찬. 스카치는 버번이 아니라, 자신이 마주 보고 있는 한 사람에게 가장 투박하고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너무나 단순하고 직선적으로, 그래서 믿을 수밖에 없는 말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정의했다. 언제 다가왔냐는 듯 멀어진 스카치에 달아오른 뺨이 들킬까 무서웠다. 예쁘다고 할 때는 언제고, 미련 없이 멀어진 스카치를 잡으려다 숨을 한번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건물 아래로 내려가는 동안 바닥에 울리는 계단 소리인지, 자신의 심장이 뛰는 소리인지 한동안 귓가가 시끄러웠다.





    버번이 맡을만한 랭크의 일도 아니었던 터라 임무는 무난하게 마무리되었다. 차를 몰고 가는 버번의 머릿속은 여전히 시끄러웠지만, 이런 속을 들킬 만큼 하수는 아니다. 멀리 도로에 나와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던 남자는 뒷좌석에 기타 케이스를 두고 보조석에 올라탄다. 밤공기에 차가운 매캐한 담배냄새 끝에 단내가 섞여있다.

    손에 들려있던 비닐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거슬린다. 간식을 즐기는 타입 같진 않았는데, 담배도 그렇고 단 것을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별 거 아닌데도 스카치의 취향이 그렇다고 생각하니 흥미가 생긴다. 집중하면 단 게 먹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런 면도 귀여웠다.



    “버번.”



    고개를 돌리면 어느샌가 스카치의 얼굴이 코 앞이다. 스카치가 산 간식이 무엇일지 생각하느라 번잡했던 머릿속이 말끔히 씻겨나간다. 놀라서 핸들을 꽉 쥐고 있는 버번이 보이지도 않는지 떨어져 나간 스카치는 솜에 알코올을 묻히는 중이다.



    “소독할 거니까, 가만있어.”



    마치고 나서 폐건물 앞이 아닌 곳으로 오라고 하길래 무슨 일인가 했더니 약국에 들렀던 모양이다. 뺨에 닿는 차가운 기운에 움찔했더니 아파서 그러는 줄 아는 모양인지, 스카치의 찌푸려진 미간이 펴질 줄 모른다. 곰 같은 손이면서, 버번의 얼굴에 닿는 손길이 병아리라도 쥐는 마냥 조심스럽다. 자세히 보니 곰까지는 아닌지도 모르겠다. 다른 걸 쥐게 해도 제법 어울릴 거 같은데. 버번이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치료가 끝났는지 스카치가 반창고를 붙여준다.



    “이게 뭐예요. 제가 7살인 줄 알아요?”



    룸미러로 본 자신의 뺨에는 요즘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캐릭터 반창고가 붙여져 있었다. 어떻게 사 와도 이런 걸 사 오는지. 게다가 버번이 아무리 동안이라지만 20대 중반의 나이다. 버번의 불만에 스카치는 무표정으로 마주 보다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꽃이 만개하듯 터져 나오는 웃음은 한동안 멈출 줄을 몰랐다. 스카치의 웃음에 입을 삐죽이던 버번이 같이 웃기 시작한 것도 순식간이었다. 둘은 어느샌가 숨도 못 쉴 정도로 소리 내며 크게 웃었다. 어린 소년들처럼 한동안 서로 얼굴만 봐도 웃던 둘이 웃음을 멈춘 건 그로부터 몇 분이 흐르고서 겨우였다.





    그 밤 이후로, 스카치는 항상 버번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빼두었다. 애초에 비밀주의로 가득한 버번과 일하는 걸 좋아하는 조직원도 별로 없었는 터에, 스나이퍼들도 자존심이 있어 버번의 까탈스러운 요구까지 맞추길 원하진 않았다. 라이 다음으로 뛰어난 스나이퍼인지라 조직에서 요구하지 않는 한, 스카치는 버번의 몫이었다.

    함께하는 시간은 매 순간이 너무나 짧게 느껴졌고, 기다리는 시간은 길고 고통스러웠다. 만나서 보내는 시간이 행복하게 느껴질수록 그가 눈앞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은 모두 의미가 사라진다. 처음 만나는 감정의 폭풍은 제 안에서 통제되지 않고 날뛰었다. 이 모든 게 위험함을 알았지만 멈추는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런 말을 할 때면 스카치는 버번을 품에 안고 부모가 자식을 달래듯이 등을 토닥였다. 그 심장소리를 듣고 있으면 무엇이든 괜찮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 * *






    돌발 임무였다. 어차피 잡혀서 죽을 텐데 끝까지 반항하는 바람에 시간이 낭비됐다. 버번은 스카치가 쓰는 세이프 하우스 문 앞에 서 있었다. 굳게 닫힌 철제문은 버번이 두드리면 열릴지 아닐지 알 수 없다. 열린다면 스카치는 왜 이런 꼴이냐며 자신을 걱정할지도 모른다. 이미 연락을 받아서 왜 늦었는지 뻔히 알면서도 묻지 않을 것이다.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조직원들 중에는 각 국가의 기관이 보낸 첩보원들이 종종 있었다. 번잡스럽고 성가시지만 저택에 쥐가 돌아다니도록 내버려 둘 수도 없는 일이다. 늦은 시간까지 이어진 고문에 한때는 조직원이었던 남자는 약물 쇼크로 사망했다. 피와 알 수 없는 액체들로 난잡해진 장소를 담당팀에게 맡기고 온 곳이 스카치가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세이프 하우스다.

    버번은 한숨을 얕게 내쉬고 떠나려 했다. 열린 문이 아니었으면. 스카치는 예상했던 것처럼 놀라거나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말없이 버번을 집 안으로 이끌었다. 스카치가 옷을 벗겨주고 밀어 넣은 욕실에는 따뜻한 물이 욕조에 찰랑였다.

    씻고 나서면 스카치가 입는 조금 큰 잠옷이 문 앞에 있었다. 소파 앞에 앉아 다리 사이에 자신을 둔 스카치는 감기에 걸린다며 드라이기로 버번의 머리카락을 말렸다. 슬프거나 속상하진 않다. 어릴 적부터 수없는 사람들이 들어오고 죽어서 나가는 것을 지켜봤다. 그런 것에 마음을 쓸 만큼 어린 나이도 아니다.

    머리카락까지 다 말리고 스카치가 데려간 식탁에 앉으면 방금 끓였는지 인스턴트 수프를 내려놓는다. 먹여주는 대로 입을 벌려 먹고 있으려니 따뜻한 액체가 몸을 데우는데 오히려 속이 타들어간다.



    “당신은,”
    “…….”
    “나 배신하지 마.”



    밑도 끝도 없는 명령, 아니면 부탁, 그도 아니면 애원이었다. 자신조차 자신이 한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까지 수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짓밟고 배신하고 이 자리에 올라섰다. 그런데 이제 와서, 정말 여기까지 와서 하는 말이 배신하지 말라는 헛소리다. 말하고도 고개를 숙였다. 이토록 초라한 자신을 바라보는 스카치를 마주할 자신은 없다.



    “안 할게.”



    왜 이 사람은 항상,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을 가장 평범한 순간에 이토록 올곧게 말해주는 걸까.

    의자에 앉은 버번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가 조용하지만 단호하게 속삭인다.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남자의 뺨을 들어 올려 입을 맞췄다. 성적인 의미로 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까지 스카치가 자신을 좋아할 때까지 기다리려던 모든 생각은 지금 입술에 닿는 이 체온에 모두 지워버린다.

    스카치의 품에서도 종종 멈춰 가만히 있노라면 버번의 등을 쓰다듬어준다. 무리하게 파고드는 자신을 밀어내지도 않는 남자에 순간마다 깨달았다. 이 사람이 없으면 안 돼, 나는. 수없는 사랑을 비웃었던 자신이 처음으로 스며든 감정에 이름을 붙인 밤이었다.







    그 후, 스카치는 종종 버번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어떻게 이 조직에 들어온 건지, 어떻게 자라온 건지, 어떤 미래를 생각하고 있는지 같은 것들.

    특별히 기억나는 것은 없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조직의 은혜로 자란 사람이었고, 조직이 원하는 일들을 행하였고, 그 대가로 조직은 그에게 버번이란 코드네임을 부여했다. 그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해 본 적은 없었다. 단 한 번, 럼이 자신에 대해 흘리듯 말한 적은 있었다. ‘그’ 가문이 바친 종자가 이렇듯 훌륭하게 자라다니, 피는 속이기 어려운 법이라고. 의아하게 쳐다보면 네 정보력으로 찾기 어려운 일이겠냐며, 의뭉스러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말대로다. 그래서 스카치의 질문에도 그저 성의 없이, 어느 정치가의 사생아라고 흘리듯 대꾸했다. 과거보다 중요한 것은 현재, 지금 자신이 어디에 속했고 어떤 존재인지가 중요하니까.



    “네 이름을 찾았어.”



    후루야 레이,라고 했다. 스카치는 그 이름을 말하며 반짝이는 눈으로 버번을 불렀다. 아니, 후루야 레이를 불렀다. 그런 게 중요한지,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그것 으로 스카치가 기뻐하니 아무래도 좋았다. 요 근래 피로해 보였는데 오늘은 오랜만에 밝은 표정이다.



    “레이니까 0, 제로라고 부를게.”
    “제로….”
    “응, 사실 나는…”



    그 순간 날카롭게 파고드는 호출음에 스카치의 말이 끊겼다. 내용을 확인해 보니 급히 자신을 찾는 내용의 문자였다. 어쩔 수 없이 현관문에 서서 헤어지려는데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는다.

    여기서 급하게 할 말은 아니라며 스카치는 말을 끊었다.



    “다녀와, 제로.”



    웃으며 자신을 배웅하는 스카치의 입에서 나온 별명은 매우 특별하게 느껴졌다. 일만 마치고 바로 돌아오면, 그 목소리로 불러주는 자신의 별명을 질리도록 듣고 싶다. 보스가 자신에게 붙여준 술 이름도, 그때그때 형편 좋게 지어낸 가명도, 어릴 적 자신을 버린 집안의 이름도 아닌, 스카치가 붙여준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

    스카치가 노크인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자신을 협력자로 이용하는 것도 알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그와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다른 것들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와 함께가 아니라면 모든 것은 무의미하다. 조직이 어떻게 되든 말든, 버번이 알아야 할 일은 아니었다. 그저 서로의 이익에 부합해서 곁에 두었을 뿐, 그도 조직도 서로가 쓸모없어지면 즉시 서로를 버리는, 그 정도의 관계일 뿐이다.

    후루야 레이라는 이름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자신을 제로라고 부르는 스카치가 너무 기뻐하니까, 그가 자신을 보며 웃어주니까. 스카치가 원한다면 제로든 버번이든 후루야레이든, 무엇이든 될 수 있다.

    그리고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레이는 두통의 메일을 받았다. 하나는 스카치가 노크이고, 그를 사냥하라는 내용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스카치의 유언이었다.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오른 계단 끝의 옥상에서 마주한 것은 이름조차 알지 못했던 노크의 시신이었다. 리볼버를 든 채 자신을 뒤로한 라이가 떠난 뒷자리에, 본명조차 알 수 없었던 남자는 자신의 심장을 뚫은 채 처참한 모습으로 죽어있었다.

    모로후시 히로미츠.

    얼마지 않아 알아낸 남자의 본명에 왜 그가 자신을 제로라고 불렀는지 깨달았다. 의미 없는 깨달음이다. 이제 더는 그를 제로라고 불러줄 사람도, 버번이 아닌 후루야 레이로 봐줄 사람도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도 한 번쯤은, 자신도 그를 애정을 담은 특별한 이름으로 명명하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그리 불러줬듯이, 제로인 자신이 불러주는 이름에 그는 어떤 표정을 지으며 돌아봤을까. 그것만은 이제 영원히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자신의 서재와 똑같은 풍경으로 꾸며진 무의식의 공간이다. 침대 옆 탁자 위에 히로미츠의 경찰학교 졸업식 사진을 올려둔다. 거수경례를 하며 밝게 웃는 얼굴은 미래의 자신에게 어떤 일이 닥칠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보고 싶어….



    꿈에서 깨면 그곳은 스카치도 히로미츠도 없는 세계다. 거짓말쟁이. 배신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그러니까 언제든지 와도 돼. 언제까지고 기다릴 테니까….

    남자는 히로미츠의 제로가 되어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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