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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이히로버번] 역시 내 청년 러브코메디는 어딘가 잘못됐다
    단편 2023. 4. 9. 23:12

    전반적으로 나오는 애들 모두 IQ2인 점을 유의하세요😂😂

    리리님의 리퀘는 분명 레이와 버번 사이에서 곤란해하는 히로였는데... 죄송합니다 ㅠ.ㅠ((석고대죄


    + 리리님께서 공유해주신 레이히로버번 같이 봐주세요(⁠≧⁠▽⁠≦⁠)👍👍💛💙



















    히로미츠는 퇴근 준비를 서둘렀다. 어차피 집에서도 편히 쉬지는 못한다. 그러나 기다리는 사람을 외면하고 사무실에서 밤을 새기엔 며칠 동안 이어진 늦어진 퇴근으로 상대방은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상태였다.  서류가방을 챙겨 다급하게 뛰어 곧 자신이 있는 층수에 도착하는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섰다. 문이 열린 엘리베이터에는, 이 건물에는 없어야 할 친우가 있었다.



    “안 타?”
    “… 타야지.”



    후루야 레이. 30살의 나이로 경시정의 자리에 오른 유례가 없는 빠른 속도로 승진을 이뤄낸, 그야말로 경시청의 살아있는 전설. 어릴 때 자신을 실성증에서 구해줬을 때부터, 히로미츠에게 있어선 영웅과 같은 존재였다.

    그리고 히로미츠는, 내려가는 엘리베이터에서 견디기 힘들 정도의 적막에 피부가 말라비틀어지는 느낌이었다. 어차피 같은 공안이라고 해야 소속도, 건물도 다르다. 둘이 만날 일이라곤 그나마 경찰학교의 동기조들이 주기적으로 모이는 날 외에는 얼굴 보기조차 쉽지 않다. 그마저도 레이는 참석하지 못하는 날이 더 많았다.



    “…그, 오늘은 무슨 일이야?”
    “…….”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럼 말하지 않을게.”



    딱 잘라 말하는 레이에게 히로미츠는 더 말을 붙이지 못했다. 당연하다. 직책이 다르고 맡은 일이 다르다. 서운해하기엔 둘의 격차가 너무 컸다. 히로미츠가 잠입했다가 들킨 탓에, 자살을 각오하고 당긴 방아쇠가 어긋난 덕에 목숨만은 부지했다. 그러나 그 후유증으로 공안의 데스크 쪽으로 쫓겨나 출세는 영원히 멀어졌다.

    그마저도 공안의 일을 너무 많이 알아 일반 부서로 이동시킬 수도 없었다. 공안의 루키에서 골칫덩이로 전락한 히로미츠는, 종종 퇴근이 늦어지는 경우가 있기는 했지만, 거의 유일하게 칼퇴근을 하며 근무 중이었다. 좋든 나쁘든, 주목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런 히로미츠에게 소꿉친구라 해도 업무 공유라니, 어불성설이다. 단순히 안부를 묻는 인사일지라 하더라도 위치가 위치이니, 레이에게 친근하게 말을 건 자신의 실수다. 조금 서운하려는 마음을 억누르고, 잡고 있던 서류가방의 손잡이를 세게 움켜쥐었다.



    “히로.”
    “…?!”



    돌아보자마자 가까워진 얼굴의 코끝이 부딪혔다. 지나치게 가까워진 거리에 뒤로 얼굴을 빼려 해도 이미 벽에 가로막혔다. 얼어있는 히로미츠의 눈동자를 들여다보던 레이가 입을 열었다.



    “네게 간 제안, 명령이야. 수락하도록 해.”
    “…….”
    “피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피한 적 없어.”



    그 말을 끝으로 닿으려는 입술을 외면하며 고개를 비틀었다. 엘리베이터의 내려가는 숫자를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돌리면 그새 잡힌 턱에 벌려진 입술 사이로 파고드는 혀는 그간의 시간이 무색하게 익숙하게 히로미츠의 안을 침범했다.

    피하기엔 너무 깊게 허락한 듯하다. 고개를 틀면서 파고든 혀가 짓누르는 안이 이전과 똑같이 기분 좋았다. 그 시절과 달라진 거라곤 레이의 몸에 걸쳐진 양복의 색 정도일까. 무심결에 레이의 목에 손을 두를 뻔했다.  그 순간 떠오른 얼굴에 눈을 뜬 히로미츠가 레이를 밀쳐냄과 동시에 건물 지하 3층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비켜.”
    “… 피하지 마.”
    “그런 적, 없, 어!”



    기어이 뺨을 주먹으로 후려치고서야 레이는 히로미츠에게서 떨어졌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을 손등으로 거칠게 닦아냈다. 자신을 노려보는 히로미츠의 시선에도 턱을 치켜들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그 당당한 시선에 납득할 뻔했지만, 모든 게 이전과 달랐다. 그날, 레이에게 이별을 고했던 시점부터 히로미츠는 자신의 곁에 누구도 두지 않기로 결심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서약서에 순간적으로 떠오른 레이의 얼굴에 망설였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인을 할 때는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순간을 그때까지 기다려온 것만 같았다. 어쩌지도 못할 마음이었다. 그러나 하기와라가 폭발사고에 휘말려 어찌어찌 목숨만 건지고, 중환자실 앞에서 무너지듯 우는 마츠다를 보면서 부모님의 일이 겹쳐 보인 것도 사실이었다.

    가장 소중한 사람을 자신의 불운으로 죽게 하는 일만큼은 피하고 싶었다. 하기와라의 병문안을 마치고 돌아온 밤, 둘은 아무 말하지 않았지만 서로에게 끝이 다가오고 있음을 납득했다. 적어도 히로미츠는 레이가 그런 자신의 의견에 동의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해외로 발령이 났으니 헤어지자는 억지에도 어울려 준 것이라 생각했다.

    히로미츠에게 온 제안은 허락을 구하는 척했지만 그 외에 선택지는 없었다. 경시정이 된 후루야 레이의 보좌를 단 한 명이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일의 적임자로 일반 부서에 배치하지도 못한 그의 소꿉친구를 공안이 눈여겨본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주위의 동료들도, ‘그’ 최연소 경시정의 곁에서 일할 수 있다니 영광이라고 여길 것이 뻔했다. 정작 당사자인 히로미츠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상관없는 것처럼.

    해치지 않겠다는 듯 과장되게 손을 들고 떨어진 레이를 노려보던 히로미츠는 문이 닫히기 전에 엘리베이터를 나섰다. 따라 내리지도 않는 남자에, 히로미츠는 그의 목적이 처음부터 자신이었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 순간 옛 연인의 얼굴을 한 남자까지 외면할 용기는 없었기 때문에.






    * * *







    경시청 근처의 단출한 아파트 2층 끝자리가 히로미츠의 집이다. 좀 더 보안이 좋은 곳에서 살라는 권유도 있기는 했지만 딱히 물욕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공안이 제시한 거주환경 중 가장 열악한 곳을 스스로 정했다. 공안에 복귀한 이후로는 수염까지 없애니 그저 평범한 공무원처럼 보였다.

    마츠다는 말끔한 히로미츠의 얼굴에 미간을 찌푸렸지만 성장의 표시로 선물한 것을 얼굴에 달고 살인을 저질렀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철면피는 아니었다. 위계질서에 엄격한 곳이니 그럴만하다고 편들어주는 하기와라가 있어 다행이었다. 3년이 꼬박 지나고서야 의식을 차린 하기와라를 붙들고 무너질 듯 우는 마츠다를 보고 자신이 레이에게 어떤 짓을 할 뻔했는지 깨달았다. 공안에 배속되자마자 헤어지길 잘했다고 그때 다시 생각했다.

    봄의 문턱을 넘은 3월 말의 집으로 가는 길에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고개를 들어 달 아래 핀 꽃을 보고 있는데 멀리서 베란다에서 뚫어져라 보는 시선에 발걸음을 멈췄다. 자신을 알아본 게 기쁜지 남자는 난간에 팔을 괴고 노골적으로 히로미츠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야 이런 평범한 골목에 저런 금발이라니 몇백 미터 밖에서 봐도 눈에 띌 것이다. 하지만 히로미츠가 그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딴에는 평범해 보이려는 목적인지 얼굴에 걸친 가는 테의 안경에 위화감을 느낀다. 한 달 전부터 함께 살게 된 불청객은 히로미츠가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유쾌하지 못한 연출을 종종 했다. 윗선에서는 그저 히로미츠의 어릴 적 인연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시킨 대로 내민 서류와 신분증으로 모든 것이 검증된, 그러나 가공의 존재인 ‘아무로 토오루’가 이미 공안에선 사라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을 조직의 간부라고 누가 믿어주기나 할지 의문이었다.

    선배에게 상담해 볼까 생각해 봤지만, 조직이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는 한때 코드네임까지 받은 히로미츠만큼 잘 이해하는 사람은 공안 내에 없을 것이다. 게다가 뭐라고 말해야 할까? 이름조차 알아내지 못했던 조직의 ‘버번’이라고 불리는 남자가 사실 모리탐정사무소의 조수로 일했던 ‘아무로 토오루’와 동일 인물이라고? 조직은 없어졌지만 그게 버번이 일하는 방식을 바꾸진 못한다. 그는 여전히 자신에게 위협이 되는 존재라면 없애는 것도 서슴지 않을 것이다. 알 수 있다. 스카치로서 그의 곁에서 지낸 세월은 허투루 쌓은 것이 아니다.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고 자연스럽게 시선을 피했다. 조직이 없어진 것도 벌써 1년이 지났다.  이제는 더 쓸모도 없을 자신에게 찾아온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한들 버번이 말해주지 않는 이상 모든 것은 추측에 지나지 않는다. 알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순간 보이지 않는 외줄 위에서 발을 헛디뎌 떨어질 것을 알았다.



    “오랜만에 기분 내보고 싶어서. 어때요?”
    “맛있어요. 이런 것까지 해주고, 늘 고마… 워.”



    간단히 씻고 식탁에 앉아 버번이 만든 음식을 먹는다. 머리가 좋은 덕인지, 한 달 동안 히로미츠와 살면서 버번은 많은 것들을 습득했다. 그중에는 레이에게 가르쳐줬던 햄샌드나 비프스튜의 레시피도 있었다. 이제는 제법 히로미츠의 입맛에 맞는 음식을 내놓기도 했다.

    그럼에도 둘의 분위기가 늘 부드럽게 흘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처럼 히로미츠가 존댓말을 하면, 버번은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한 표정으로 히로미츠를 노려본다. ‘스카치’는 그러지 않았으니까. 4년 전에 벗어났다고 믿었던 이름은 이렇듯 자신의 곁에 머무르는 남자에 의해 다시 족쇄가 된다. 즉시 잘못을 수정했으니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식탁 위에 내리는 한기에 착각임을 깨닫는다.



    “스카치.”

    나는 스카치가 아냐.

    “응.”



    하지만 말할 수는 없다. 애초 이 집에 남자가 쳐들어올 때부터 나가노에 있는 형의 존재에 대해 들먹인 버번에게 히로미츠가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소중한 게 많으니까 잡히는 거예요, 스카치.’ 자신을 보며 잃어버린 장난감이라도 찾은 것처럼 환하게 웃어 보이는 남자는 보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쳤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뭔지 알아요?”
    “…….”



    맞은편에서 일어나 다가온 남자는 히로미츠의 턱을 붙들었다. 버번의 눈동자를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보지 않으면 다음에 누구를 노릴지 따라갈 수 없다. 거실의 중앙등을 등지고 서 내려다보는 탓에 역광인 남자의 표정을 읽기 어려웠다.  포커 게임에 패를 내보이고 자리에 앉혀진 기분이었다. 레이와 달리 차가운 손끝이 입꼬리에 닿자마자 쳐내버렸다. 거부당한 손을 보란 듯이 들고 서 있던 버번이 고개를 기울였다.



    “내 거에 누가 손대는 거, 그게 진짜 어릴 때부터 너무 싫었어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
    “내 눈에 예쁘니 남들 눈엔 오죽하겠어요.”



    두 번은 없을 것이다. 다시 히로미츠에게 다가오는 버번의 손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머리카락을 넘겨주는 손가락은 다정했지만 그뿐이다.



    “살아있는 나를 원한 건 너잖아.”
    “…….”
    “어차피 나를 죽여서 박제해도 그건 스카치가 아니니까. 나는 지금 죽어도 돼. 그럼 너는 영원히, ”
    “히로.”
    “…….”
    “나를 너무 화나게 하지 말아요.”



    레이가 보면 공안으로서 적절한 대처를 했다고 칭찬해 주려나. 분노로 일그러진 남자에 의해 더 말을 할 수 없도록 턱이 붙잡혀 강제로 시선을 마주한다. 버번의 약점이 스카치란 것은 재회하자마자 알았다. 히로미츠에게 타카아키를 들먹이며 협박하는 남자에게 히로미츠는 스카치에게 칼을 겨눠 이 정신 나간 게임에서 버번과 대등한 위치에 앉아 마주 볼 수 있었다.

    어쩌면 한순간의 호기심일지도 모른다. 버번이 왜 살아있는 스카치를 원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용할 수 있다면 이용할 뿐이다. 오히려 기꺼웠다. 버번을 구속할 수 있다면 이것만큼 편리한 수단은 다시 찾기 어려울 것이다. 죽기 전까지는.



    “날 보면서 누굴 생각하는지 내가 모른다고 생각해요?”
    “…….”
    “응? 히로. 대답해 봐.”
    “닥쳐….”
    “내가 굳이 안경까지 써가면서 친절하게 굴고 있잖아, 히로.”



    친절이 아니라 기만일 뿐이다. 옛 연인과 똑같은 얼굴로, 그가 부르던 것과 똑같은 호칭으로 자신을 불러대는 남자의 손에 몇 번이고 피가 묻었던 것을 지켜봐 왔다. 그런 주제에 레이와 같은 얼굴과 목소리란 이유 하나만으로 히로미츠는 조직에 잠입했을 때 무심결에 상냥하게 대하곤 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결국 버번을 협력자로 만들기 위해서였을 뿐이다. 아무리 그가 평생에 걸쳐 사랑해 왔고, 또한 사랑할 사람과 똑같은 외모와 목소리라지만 그것만으로 버번을 사랑하게 될 정도로 히로미츠가 무른 사람은 아니다. 짧게 한숨을 내쉰 히로미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정한 사람으로 연기하는 건 이쯤이면 충분하다.

    목에 건 넥타이의 노트 안으로 턱에 있던 버번의 손가락을 걸게 했다. 어차피 레이가 알 수도, 알 필요도 없는 일이다. 레이의 목 뒤에 두르지 못했던 팔로 레이와 닮은 남자의 목을 끌어안는다. 어느 것이 옳은지 판단하기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그렇다면 지금 눈앞의 남자가 원하는 것에 어울리는 것도 그리 나쁜 선택은 아닐 것이다.



    “약았네요, 당신.”
    “덮어쓰기는 네 특기잖아, 버번.”



    헛웃음을 터뜨리는 남자가 뽑듯이 풀어내는 넥타이가 뒤로 던져지는 것을 바라보며 숨을 잡아먹을 듯 부딪혀오는 키스에 입을 벌렸다. 이런 우아하지 못한 섹스어필까지 다 받아주니까 어리광만 늘고 있다. 버번에게 미안함 따윈 느껴본 적 없다. 어차피 그도 자신에게서 허상인 스카치를, 자신도 그에게서 레이를 찾는 기묘한 거래를 할 뿐이다.

    다른 남자에게 안겨서 옛 연인을 찾는 남자라니, 이보다 더 최악이기도 힘들겠지. 필사적인 버번의 얼굴을 마주보며 히로미츠는 눈을 감았다.







    * * *







    눈에 띄는 곳에는 자국을 내지 않는 걸로 약속했던 것 같은데. 이래서야 조만간에 상부에 동성 파트너로 명칭을 바꿔 보고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지인이지만 같이 살다 보니 그렇게 되더라고요. 고지식한 면이 있는 선배에게 충격받지 않게 돌려서 말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지금은 생각나지 않아도 분명히. 어차피 아이가 생기는 걸 좋아하지 않는 조직이라 잘 설명하면 좋게 넘어갈 수도 있다. 나중에 임무로 결혼해야 하는 경우는… 그때 가서 생각하자.

    침대에 누워 만족스러운 듯 자신을 올려다보는 남자를 무시했다. 목에 난 자국 때문에 다시 단추를 풀러 살구색 파스를 찾았다. 이게 더 눈에 띌 수도 있겠지만 누가 봐도 전날 한바탕 뒹굴었다고 대놓고 보여주는 것보단 낫다. 그렇다고 옷아래 가려지는 곳들이 멀쩡한 것도 아니다. 셔츠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버번이 전날 골라둔 넥타이를 맨다.



    “오늘 일찍 와요.”
    “언제는 늦게 왔었나.”
    “자꾸 애매하게 퇴근 늦으니까… 따뜻할 때 같이 저녁 먹고 싶은데….”
    “시간 남으면 운동이라도 할까.”
    “그거 유혹?”



    대꾸할 가치도 없어 그대로 현관문을 나섰다. 집 밖의 벚꽃은 전날과 똑같이 봄바람에 흔들렸다. 시선에 고개를 돌려 위를 보면 어느샌가 베란다에서 자신을 마중하는 남자가 손을 흔든다. 조금은 맞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 손을 잠깐 흔들고 내렸다. 활짝 웃는 얼굴에 바로 뒤를 돌았다.

    괜찮다. 어차피 저 남자는 금세 사랑에 빠지고 금세 질리는 사람이니까. 왜 살아있는 스카치 곁에 머무르고 싶다고 생각했는진 모르겠지만 그 또한 오래가지 않을 변덕이다. 해가 뜨고 지는데, 시간이 흐르는데, 꽃이 피고 지는데 이유가 있었던가. 그러니 히로미츠는, 남자의 변덕이 자신에게 머무르는 동안만 곁을 허락하면 될 일이다. 잠깐 올라간 셔츠 아래의 손목에 있는 불긋한 자국을 다시 옷을 내려 가렸다.






    늘 똑같은 아침이었다. 전날 옛 연인과 키스를 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이미 없어진 범죄 조직의 남자와 기싸움을 하고, 마지막에는 그 남자와 침대에서 뒹굴었던 것만 뺀다면. 그것들만 빼면 정말 평소와 다를 게 하나도 없는 집-청사의 반복이다. 눈앞에 있어야 할 자신의 책상이나 짐들이 모두 사라지긴 했지만.



    “모로후시. 승진 축하해. 근데 왜 여기로 왔어? 데스크 바뀐 거 공지 어제 확인한 거 아니었어?”
    “이케다…. 승진이라니 무슨 말이야? 공지라니?”
    “업무 공지 게시판… 어이!”



    전날 아침 시끄럽긴 했었다. 하지만 자신과는 상관없는 이야기라 여겼다. 분명 확실하게 선배에게도, 레이에게도 거절했으니까. 자신을 향한 수군거림은, 늘 있는 일이었다. 지금이야 편하게 이야기할 동료도 생겼다. 하지만 3년을 미국에 있는 일본 공안 지사에서 파견직으로 일하다가 1년 전 돌아왔을 당시에는 아무도 그를 반기지 않았다. 자기 책임의 원칙이 있으니, 무능한 것도 모자라서 살아 돌아온 것을 질책받는다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게시판에 내걸린 인사이동문을 보자마자 히로미츠는 오래간만에 뒤통수가 얼얼할 정도로 속에서 천불이 끓었다. 최소한 본인에게는 따로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 말을… 했다. 며칠 전 카자미가 따로 불러내서 이번에 좋은 자리가 있는데 도와달라고 했었다. 바로 거절했다. 레이와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모두 거절했는데 이런 식의 일처리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카자미는 경찰청에 있는데 카자미의 보좌역이나 해야 할 히로미츠가 경시청으로 건물을 옮긴다는 건 명백한 월권이었다. 레이가 자신에게 미련이 있는 건 알았다. 서로 사귀었던 시간이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지기 마련이니, 히로미츠는 그 모든 것을 흘려보내는 쪽을 택했다.

    헤어질 때는 다들 그렇다. 당장 보지 못하면 괴로움에 죽을 것 같더라도 결국 잊는 것이 사람이다. 안다. 히로미츠가 그랬으니까. 부모님이 살해당하는 현장에 있었던 충격으로 말하지 못했던 7살짜리였던 자신도, 결국 잊고 살아왔으니까. 살아졌으니까. 그게 인간이니까.

    하물며 사랑이었다. 부모자식 간의 상실도 결국은 잊게 된다. 그렇다면 연인 간의 사랑은 어떨까. 답해본들 의미 없는 일이다.

    엘리베이터에 카드키를 찍자 불이 들어오는 층수에 그제야 경찰청의 카드키로도 여기까지 올 수 있었음을 깨달았다. 답답함에 한숨이 났다. 어제 받아줘선 안 됐다. 그러는 게 불가능함을 알면서도 히로미츠는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레이를 원망할 것만 같았다. 그것만은 싫었다. 그래서 히로미츠는 자신을 탓했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두드리려는 순간 들어오란 목소리가 들렸다. 어차피 공안의 감시가 평생 따라붙을 것은 각오했다. 친구들과 만나지 못하게 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나가노에서 형과 함께 사는 것도 좋을 것이다. 비록 그게 어릴 적 사건을 다시 떠올리게 만들더라도, 이번에는 혼자가 아니니 버틸 수 있겠지. 그 순간 떠오른 집에 있을 남자의 얼굴은 애써 무시했다.



    “무언가 문제라도 있을까, 히로?”
    “인사이동 철회해 주십시오, 경시정 님.”
    “알았어.”
    “아무리 경시정 님이라도 이런 식… 네?”
    “철회한다고, 인사이동.”



    맥이 풀렸다. 어릴 때는 레이의 웃는 얼굴을 정말 좋아했는데, 지금만큼은 화가 났다. 무엇을 위해 이렇게 자신을 휘두르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만나지 못했던 4년간 레이는 확실히 히로미츠가 예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성장한 것만은 분명했다.



    “무슨 일처리를 이런 식으로…”
    “대신, 같이 살자. 히로.”
    “……너 미쳤어?”



    결국 무너진 포커페이스에 만족한 듯 레이가 웃음을 터뜨렸다. 공사를 구분하지 못하는 후루야 레이라니, 총을 뺏기는 FBI보다 더 이상하다. 히로미츠는 정신 나간 것처럼 웃는 레이를 보면서 이 상황을 냉정하게 분석하려 애썼다. 하지만 손이 먼저 나갔다. 멱살을 잡아 올리는 히로미츠의 손을 잡고 레이가 웃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너라면 이 서류들이 뭘 의미하는지 잘 알 거야.”



    레이가 내민 보고서를 받아 들었다. 멱살을 내팽개치고 종이를 넘겼다. 한 장 한 장 넘길수록 피가 식는 느낌이었다. 종이 위의 검은색 잉크들은 지난 4년간 후루야 레이가 어떤 시간을 보내왔는지 무감하게 정의 내렸다. 그제야 이 모든 게 왜 명령으로 이뤄져야 ‘만’ 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울지 마.”



    어떻게 웃을 수 있어. 안타까운 듯 웃는 레이에게 히로미츠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기와라를 잃은 뻔했던 것은 22살의 후루야 레이도 똑같았는데, 평생의 짝이라 생각했던 사람을 이유도 없이 잃어야 했던 것은 23살의 후루야 레이도 똑같았는데, 영문도 모르고 히로미츠가 죽을 뻔했다는 소식을 공안에서 일하지 않았다면 몰랐을 뻔했던 26살의 후루야 레이가 있었는데.

    그럼에도 히로미츠는 또 소중한 사람을 잃기 두렵다는 이유로 자신의 손으로 레이의 심장을 도려냈다. 그 모든 게 자신을 지키기 위한 도망에 불과했음에도. 그러나 후루야 레이는 히로미츠를 책망하지 않았다. 끝에 끝으로 다다라서, 망가지고서야 자신을 찾은 사람에게 히로미츠가 할 수 있는 말은 아무것도 없었다.



    “나도 널 존중하고 싶어, 히로. 네게 날 돌아봐야 할 의무는 없다고 나도 동의해. 그런데 어쩔 수가 없어. 자꾸, 꿈을 꿔. 내가 없는 곳에서 네가 죽어가는 꿈을. 나는 단 한 번도 널 구하지 못해. 당연하겠지. 널 구한 일이 없으니까.”
    “…….”
    “내게, 기회를 주면 안 될까.”
    “… 제로….”



    허락의 말을 뱉으려던 혀가 굳은 건 순간이었다. 마음이야 백번 레이에게 기울어졌다. 하지만 집에 있는 사람을 혈혈단신으로 내쫓는 짓을 히로미츠가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창백해진 히로미츠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레이가 살구색 파스를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히로, 혹시 사귀는 사람이 생긴 거야?”
    “아니야!”
    “… 그래?”
    “음, 그, 지금 친구가 같이 살고 있어서. 일단 정리되면 바로 제로네 집으로 옮길게.”
    “친구? 내가 아는 사람이야?”
    “아니, 미국에서… 만난 친구라서, 제로는 모를 거야.”



    히로미츠는 어색하게 레이에게 잡혀있던 손을 빼냈다. 손바닥이 축축한 걸 들키면 끝장이다. 데스크로 쫓겨났다지만 나름 현역이었는데 왜 이렇게 거짓말이 혀 끝에 걸려 툭툭 내뱉는 것처럼 말이 이어지는지 모르겠다. 일단 버번과 헤어질 핑계부터 생각해야 했다. 어색하게 집무실을 빠져나와 마른세수를 했다. 피곤했다. 히로미츠는 일이 많길 바라며 어기적 걸음을 옮겼다.






    * * *






    버번은 기분이 꽤 좋아 보였다. 아침에 인사에 답해줬던 게 퍽 맘에 든 모양이다. 히로미츠는 이번달 생활비를 도박으로 다 날렸다는 말을 해야 하는 가장의 심정으로 버번의 눈치를 봤다. 그동안 … 원한 건 아니었지만 집안일을 해준 사람에게 일방적은 퇴소 통보를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버번과 제로를 놓고 생각한다면 답은 하나다.

    설거지를 마치고 함께 나란히 앉아 티비를 보았다. 슬그머니 히로미츠의 트레이닝 바지 안으로 들어오려는 남자의 손목을 붙들었다.



    “역시 이틀은 무리,”
    “버번. 미안한데 당분간은, 아니 어쩌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 이 집은 편할 대로 써도 돼. 집세는 내가 낼게.”
    “… 뭐라고요?”
    “그게…?!”
    “뭐야 당신. 내가 우스워?”



    바로 떠밀려 넘어졌다. 역광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말하는 남자의 윽박에 무어라 변명할 거리도 떠오르지 않았다. 일방적으로 시작된 관계였지만 그런 게 버번에게 중요할 리 없었다. 조금 부드럽게 돌려서 말해도 됐을 텐데 마음이 급했다.

    역시 이렇게 되는구나. 목으로 뻗어지는 손에 어떻게든 무릎을 움직여 걷어차려는데 얼굴 위로 떨어지는 물기에 집에 비가 새나 생각했다. 하지만 화창한 바깥에는 달무리 하나 없다. 그럼 얼굴 위로 떨어지는 이 물기는 뭘까. 하나밖에 없는 답을 부정하며 위를 올려다보면 버번이 뻗은 손은 히로미츠의 어깨를 붙들고 있었다.

    알고 있다. 매번 필사적인 표정을 갈무리하지도 못하고 내비치는 남자의 마음을 모르기도 어려운 일이다. 사랑을 모른다고 사랑을 할 수 없을까. 그 어떤 형태로든 누군가를 생각하는 진심이란 누가 가르쳐준다고 깨우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히로미츠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다. 길 잃은 아이처럼 서럽게 우는 남자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해 등을 토닥였다.

    스카치를 찾는 척 굴었던 게 그것 외엔 버번 스스로도 납득할 길이 없음을 알면서 모른척했다. 진심이라 깨달아도 히로미츠가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평생을 곁에서 감시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조차도 이젠, 어렵게 되었다.



    “그만 울어…. 내가 잘못했어.”
    “… 왜, 왜 날 기다리지 않은 거야. 내가 다 필요 없다고 했잖아. 협력도 해줬잖아. 조직도 없앴잖아. 근데 왜 난 안 되는 거냐고!!!”



    그러고 보니 고위 간부 중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공안에 협력했다고 듣긴 했다. 처음에는 진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지만, 쿠도 군에게 협력한 베르무트가 검증해 줘서 큰 도움이 됐다고 들었다. 정말 바보다. 그런 짓을 한들 누가 알아줄까. 히로미츠 말고는 알아줄 사람도 없었을 텐데, 그 히로미츠의 생사도 제대로 알지 못했으면서. 잘게 떠는 등을 쓰다듬으면 울음을 그친 남자가 훌쩍였다.



    “가지 마요. 내가 더 잘해줄 수 있어.”
    “… 그게, 가고 안 가고의 문제가 아냐….”
    “그래. 히로는 내 거니까 떼는 그만 써. 버번.”
    “……제로?!??”
    “하! 어른인 척하면서 경시청에서 손가락이나 빨지 그래, 후루야 레이?”
    “……버번…?”



    언제 문을 열고 들어온 건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회색 양복 위에 걸친 레이가 히로미츠의 위에 있는 버번의 이마를 검지로 꾹 밀었다. 버번이 짜증 나는 벌레처럼 그 손가락을 쳐내기 전에 거둔 레이는 히로미츠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일으켰다. 졸지에 두 남자 사이에 앉게 된 히로미츠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참고로 버번과 살 수 있게 허락해 준 게 나야, 히로.”
    “그건 전부 내가 협력해 줬기 때문이잖아, 공안의 쥐새끼 주제에.”
    “그래, 한 달이면 충분하다고 내게 으름장 놓던 것도 기억하는데.”
    “내가 알아내지 못했으면 히로는 죽은 걸로 덮으려고 했잖아, 이 구렁이 같은 공안!”
    “둘 다 그만!!!”



    자초지종을 들어보니, 아무리 베르무트가 검증해 줬다고 해도 그 정보를 수용하기까지 상부의 잡음이 심했다고 한다. 그런 중에 레이가 나서서 버번과 접촉했고, 공안 내부에는 알리지 않은 거래를 했다고 한다. 레이라면 충분히 그럴만한 위치긴 했다. 그렇긴 한데…

    아무튼 조직은 사라졌고, 히로미츠는 1년 전에 일본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온전한 몸이 아니어서 경찰병원에서 계속해서 검사를 받아야만 했다. 그러던 중 버번이 우연히 히로미츠가 일본에 입국한 것을 알았다. 그때까지 히로미츠가 죽은 것처럼 자신을 속였냐며 노발대발하는 버번이 요구한 게 히로미츠와 한 달 동안 동거하는 것이었다. 그 정도면 넘어오게 하는 건 일도 아니라고.

    약속했던 한 달이 지났고, 히로미츠가 버번을 택하면 레이는 물러날 생각이었다.



    “웃기시네. 물러날 생각이라면서 그딴 식으로 구질구질하게 굴어?”
    “정말 널 사랑했다면 거절했겠지, 아닌가?”
    “히로. 잘 생각해 봐요. 저 새끼는 언제고 나라와 당신을 택해야 하는 순간이 오면 히로를 버릴 거야. 난 아니에요. 히로도 내가 진심인 걸 알잖아요.”
    “히로. 난 정말로 네가 필요해. 제발 내가 널 두 번 잃게 하진 마. 부탁이야.”



    각각 한 팔씩 잡아당기는 탓에 안 그래도 과도한 정보량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이 두 개새끼들, 아니, 개는 잘못이 없다. 미친놈들에게 되지도 않는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는 이 현실은 꿈이 아니다. 고개를 꺾어 천장을 보면 시선이 노래졌다. 파란 걸까? 아니, 어쩌면 초록색일지도.



    “둘 다 꺼져!!!!!!!!!”



    여자 둘에게 사랑받는 전개를 꿈꾼 적은 없지만 적어도 이런 미친놈들에게 사랑받고 싶진 않았다. 조만간 타의로 거주지를 레이의 고급맨션으로 원치 않는 군식구와 함께 셋이서 살게 될 미래를 모른 채 히로미츠가 지르는 비명이 동네에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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